[기자칼럼] 신중년

    기자칼럼 / 오현세 / 2014-01-03 15: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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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세 객원기자
    ▲ 오현세 객원기자
    고령화와 더불어 갑자기 신중년이란 단어가 화두다. 고령화는 이해하기 쉽다. 사회구성원 가운데 나이 많은 사람의 비중이 늘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신중년은 어떤가? 상당히 만만치 않은 단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중년이란 단어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우선 신중년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나이대는 얼마인가? 처음 이 단어가 사용될 무렵에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신고령 고용정책을 시작한 핀란드를 예로 들며 55~64세를 신중년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런데 각 지자체가 발표한 금년 신년사를 보면 대부분 신중년 인구 대상을 60~75세로 지목하고 있다. 핀란드가 신중년 정책을 내놓은 것이 1998년, 불과 15년만에 신중년의 상한선이 10년이나 확대 된 것이다.

    55~64세 인구와 60~75세 인구는 단순히 주민등록상의 나이만으로 분류할 수 없다. 그 질에서 천양지차다. 10대와 20대, 20대와 30대 등을 생각해보라. 50대와 60대, 70대가 얼마나 다를 것인가? 여기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한 세대를 위한 정책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정책을 세우는 동안에 그 대상이 계속 변한다면? 정책이 미처 따라 갈 시간이 없어진다. 게다가 신중년의 대상이 70~90세까지로 확대되지 않으리라는 보증이 어디 있는가? 100세까지 확대되는 날에는 어찌할 것인가? 획기적인 정책으로 늘어가는 신중년을 앞서가지 않는 한 영원히 대책만 세우다 마는 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 집단 또는 한 세대를 위한 정책을 세울 때 지금까지는 대개 그 집단 또는 세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 일을 맡았고 또 그것이 결과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신중년 또는 고령화 정책에만은 그런 경험을 처음 겪는 세대가 매달려 있다. 말하자면 급격히 늘어난 수많은 고령인들을 태우고 질주하는 자동차를 쌩초보가 몰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책과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봄철인데 겨울 옷들인 경우가 태반이다.

    일단 현실을 수긍하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온 세상이 처음 겪는 현상인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은 결과를 도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단 대상을 과감히 확대해야 한다. 일단 최대 고령 연령을 최소한 90세로 상향조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 상한선이 100세로 높아져도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된다.

    두 번째로 신중년의 정체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현재 난무하고 있는 신중년 정책을 보면 고령화 인구의 복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느낌이다. 즉 생계 대책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다. 물론 생계유지는 중요하다.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자. 역사상 국가가 노인들을 위한 구휼정책을 펴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효과적이었나, 충분했나의 관점을 떠나 보면 삼국시대부터 이미 노인들을 위한 복지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식량을 정기적으로 배급했으며 경로잔치도 매년 의무적으로 개최했다. 고려, 이조시대로 넘어오며 이러한 정책은 계속 확대되었다.

    당시의 노인들은 생계가 최우선이었다. 노인을 부양하라고 그 자식의 부역을 면제해 준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지금도 생계유지만 해결하면 신중년은 행복해지고 고령화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가? 그렇다면 이 오래된 역사를 재현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까?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고령화, 신중년 대책은 일차원적인 구휼대책에 머물고 있다.

    물론 다른 듯 보이는 정책들도 있다. 신중년을 경제활동의 일부 주체로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그것이다.

    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사회 기여도 활성화 대책들이 그것이다. 아주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신중년을 위한 경제활동, 취업확대라는 것의 실체를 보자. 한마디로 허드렛일을 하라는 것 아닌가? 즉 보잘 것 없는 일거리를 통해 약간의 소득을 얻어가라는 것 아닌가?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에게 풀 뽑는 일을 주고 사회에 참여했다고 여기라고? 생계형 연금과 무엇이 다른가? 실체를 들여다보면 역시 구휼대책 아닌가?

    그러나 기억하자. 신중년이 바라는 것은 사회에 기여함으로서 얻는 자존감이다. 모든 신중년 대책은 이 기본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신중년은 구휼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어야 하고 존중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은 여러 가지로 보상을 받는다. 가장 손쉽고 가시적인 것이 금전이다. 나머지는 주변으로부터의 인정이다.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타인의 인정. 이것이 인간을 긍정적인 사회적인 동물로 만드는 가장 큰, 금전적인 보상보다 오히려 큰 보상이다. 신중년 대책에 이러한 관점이 최우선시 되지 않는 한 어떤 대책도 성공할 수 없다.

    신중년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인 활동은 얼마든지 있다. 건강한 신중년이라면 조를 만들어 치안유지, 사회 질서 유지나 어린이집의 도우미로 활용할 수 있고 바깥나들이 정도만 할 수 있는 신중년이라면 지역회관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이나 자문 역할도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있다. 요점은 신중년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하라는 것이다. 결코 한 달에 얼마 주겠다는 금전적인 측면에서만 신중년 대책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신중년 대책의 밑바닥에는 ‘나이든 사람이 뭘 하겠어?’라는 무시감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들 때까지. 단, 악순환이 영원히 되풀이 되어도 견디겠다는 각오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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