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 정객 손학규의 사자후
고하승
gohs@siminilbo.co.kr | 2023-12-06 12:24:02
손학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이 6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 “나라를 위해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라며 사실상 대표직 사퇴를 압박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지난 4일에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선거제 개편에 미온적인 민주당 지도부를 겨냥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특히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며 거취 문제까지 거론했다. “화가 치민다”라고도 했다.
그는 이미 정계를 떠났다. 그저 가까운 지인들과 만나 막걸리 한잔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하는 걸 낙으로 알고 있다. 간간이 손녀 보는 재미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정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이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이처럼 이재명 대표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일까?
이 대표가 대선 후보 당시 약속했던 정치개혁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까닭이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적용할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두고 민주당 안에서는 현실론과 원칙론이 충돌하고 있다.
애초 민주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롯한 정치개혁을 당 차원에서 약속해왔다. 이재명 대표도 대선 후보 당시 이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가 최근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라며 현실론을 밝힌 뒤 지도부 소속 의원들이 전방에서 제도 개악의 물길을 터 가는 모양새다.
실제로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전날 선거제와 관련한 입장을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당내) 의견을 모아가야 하기에 제가 입장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라면서도 “제가 우스갯소리로 우리 당 의원들에게 ‘대선 때 우리가 정치개혁 한다고 한 약속을 다 지키면, 당시 3선 (국회의원) 연임 금지까지 약속했는데 그걸 다 지킬 건가. 모든 약속을 다 지켜야 하느냐’고 물었다”라고 답했다. 사실상 ‘연동형 비례제 사수’를 통한 비례성 확대라는 민주당의 약속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다.
실제로 지도부 안에선 여당인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밝힌 병립형 비례대표제가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손 고문은 “여야가 합의해 연동형을 병립형으로 회귀시키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거대 당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공고화하고 정치적 대결구조를 심화시키는 커다란 후퇴”라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거대 야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무기로 탄핵을 마구 자행하며,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할 것이 명백한 법안을 의도적으로 통과시켜 국정을 혼란 시키고 있다”라고 질타했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다당제를 통한 연합정치 속에 합의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이 최선의 과제라는 게 손 고문의 생각이다.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이를 위해 초석을 다지는 과정이라고 했다.
손 고문의 이런 사자후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정계복귀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심지어 손학규 신당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 손 고문은 “그런 계획 없다”라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는 “요즘 편히 쉬고 있는데 나라 걱정이 자꾸 생겨서 걱정 않고 살게 해달라고 호소하러 나왔다”라고 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필자는 그의 진심을 믿는다.
손 고문은 ‘이재명 대표가 총선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선당후사가 제1의 덕목 같지만, 이제는 당보다 나라 걱정을 우선시하는 선국후당이 돼야 한다”라고 답했다.
자신보다는 당을 위하고, 당보다는 나라를 우선해야 한다는 게 그의 정치철학이다. 그가 사심(私心) 없이 연동형비례대표제에 목숨 걸고 단식에 나섰던 것도 거대양당제보다는 다당제가 정치 발전, 나아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연일 이어지는 노정객 손학규 고문의 사자후(獅子吼)는 여야 정치인들이 모두 귀담아들어야 한다. 단기적으로 ‘우리 당이 몇 석 더 얻을까’라는 손익 계산은 우둔한 정치인들이 하는 짓이다.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장기적으로 어떤 제도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