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신의 실크로드기행
차창 밖 하늘은 온통 잿빛
시민일보
| 2003-02-03 17:23:33
기차안이다.
쿠처에서 19시 12분에 출발한 좌석표도 없는 입석표를 끊고서 운좋게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서 3시간째 달리고 있다. 기차 창문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있고 여기에서도 비가 온 탓인지 사막 위에 풀들이 촉촉이 젖어있다.
23시 30분경에 도착을 할텐데 쿠얼라를 여행한지가 2년이 다되어 가기 때문에 시내 중심까지 배낭을 메고 걸어가기에는 좀 멀었다는 기억이 났다.
밤늦게 도착을 하는 관계로 혹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이른 아침 맑고 깨끗하던 하늘이 오후가 되면서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이 지역에 약 2시간동안 소낙비가 쏟아지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다시 말꼼이 햇살이 비추었다.
학생들은 여름방학에 들어갔고 휴가를 맞은 외국 여행자들이 서서히 신강 지역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으며 언제나 씩씩하게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일본인 아가씨들을 흔히 만날 수가 있었다.
또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유럽인들을 오늘 하루만도 여럿 스치었다.
가깝게는 30km에서부터 멀게는 100km까지 떨어져 있는 고대 쿠처왕국의 유적지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나마 공사 중이었던 멀지 않은 유적지들을 돌아본 것만으로도 만족을 하고 쿠얼라로 향하는 마음이 다행스러웠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유적지들이 대부분 엉망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생스럽게 수십 킬로미터까지 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염려 속에 위안을 삼는다.
눈이 내리는 하얀 겨울에 또 다른 매력이 있을 쿠처를 다시 한번 여행하고 싶다.
여행을 떠나서도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간혹 있긴 하지만 이렇게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모든 것들을 잊고서 상큼한 풀잎처럼 파릇파릇한 생각만이 나를 붙잡아 두곤 한다.
사막 위로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간간히 보이는 트럭들이 길도 없는 길을 따라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고 덩그러니 외로운 사막 위에 떠있는 섬처럼 가뭄에 콩나듯 나타나는 집에서 희미한 불빛만이 사막을 깨우고 있을 뿐이다.
그저 달리고 있는 기차 안에는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고서 얘기를 하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 있지만 어쩌다가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노라면 반갑기 짝이 없다.
희미한 조명아래 피곤에 찌든 모습들은 하루가 모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며 13억 인구 모두가 살판나는 세상이 올 때까지는 엄청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처럼 그 날이 올 때까지 희망을 간직하는 것만으로 대신할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전문가 kapabah@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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