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세상의 명암
‘인터넷 대란’‘카드범죄’… 작은 오류에도 큰 파괴력
시민일보
| 2003-03-17 17:42:14
먼저 유비쿼터스 세상의 한 면을 들여다보자. 휴대전화에 내장된 GPS(위치파악시스템) 기능은 인공위성과 연결해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고, 인터넷에 연결된 전자레인지는 가장 맛있는 요리법을 검색해 요리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컴퓨터가 차량의 현재 위치나 개인의 음식취향 등의 개인적인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수집된 각각의 정보는 특정 개인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데이터를 형성한다.
또한 키워드별로 수집하면 수많은 사람들 중 일정한 특성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골라낼 수도 있다.
즉 정보가 특정 목적에 맞게 ‘가공’되기 시작하고, 나아가 가공 수준을 넘어 ‘판매’되기에 이르게 된다.
아마존닷컴은 고객정보를 자산으로 보아 사고팔 수 있다고 규정을 변경해 일방적으로 고객에게 통보했고, 미국의 엑스페리언 사는 미국인 2억명의 자료를 AT&T, 월마트 등의 거대기업에 판매하는 정보기업으로 자산 규모가 15억달러에 달한다.
BC카드 같은 신용카드 회사는 고유의 카드번호를 갖고 있는 고객을 전세계에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 규모의 데이터를 구축할 수도 있다.
결국 유비쿼터스 세계에서는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사라질 수도 있다. 비밀이 없어지는 것은 단지 프라이버시뿐이 아닐 것이다.
비밀 없는 세계는 독점을 가능하게도 하고 불가능하게도 한다. 이것을 헌터는 두가지 법칙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는 네트워크는 증폭기라는 것이며, 둘째는 모든 정보가 공개되더라도 그것을 모두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모든 정보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건은 손쉽게 올바른 정보만을 골라내는 것인데 이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정보를 찾는 대신 전문가나 대중매체의 주장을 수용하게 된다.
이들을 책에서는 ‘멘텟(mentat)’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실질적으로 정보에 대한 판단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멘텟이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고의로 왜곡한다면 진실이 묻혀버릴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높아진다.
하지만 정보의 독점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커지고 있다. 책에서 제시하는 ‘네트워크 군대(network army)’가 그 주인공이다.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회의는 전세계에서 모인 시위행렬 때문에 합의문을 도출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 시위행렬은 치밀하게 계획되고 지도된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파급된 것이었다. 이같은 네트워크 군대의 힘을 우리는 ‘붉은 악마’나 ‘노사모’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네트워크의 힘은 그에 속한 구성원의 수와 그들의 개별적인 역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사안에 따라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체제에 저항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을 벌인 것처럼, 네트워크 군대는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하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유비쿼터스는 우리의 삶과 사회 모델 자체를 바꿔놓을 만큼 획기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물이 컴퓨터화되고 통합되는 시대에서는 한 곳에서 작은 오류만 생겨도 전체 네트워크가 파괴될 수 있다.
지난 1월말 일어난 ‘인터넷 대란’과도 같은 사태가 컴퓨터와 연결된 가전제품과 사무기기, 자동차, 교통ㆍ통신 시스템에도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보안상의 작은 허점이나 이용자의 실수, 혹은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가 낳는 결과는 엄청나게 파괴적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많은 개념은 이미 선진기업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거나 상용화단계에 접어든 것들이다. 예전에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신기해했던 많은 것들이 우리 생활에 편입되고 있다.
저자는 신종 ‘빅 브라더’의 감시를 받지 않고 정보의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을지, 제2의 인터넷 대란이나 신용카드 범죄를 되풀이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과 함께 책을 매듭짓는다.
원제 ‘World Without Secrets: Business, Crime and Privacy in the Age of Ubiquitous Computing’.
윤정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와 전문번역가 최장욱씨가 우리말로 옮겼다.
360쪽. 1만3000원.
박정식 기자 pjs@simin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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