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순종의 역사를 넘어…

아내의 역사 매릴린 옐롬 지음/ 시공사 刊

시민일보

| 2003-06-09 20:11:40

남성과 남성이 만들어낸 법률과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내의 역사는 속박과 순종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에 아내는 ‘남편의 재산’이었고, 중세에는 ‘출산의 그릇’으로 남편이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금욕을 중시하는 중세 기독교는 독신을 결혼 생활보다 높이 평가해 아내의 지위는 과부와 처녀 다음이었다. 불과 150여년전까지도 결혼을 하면 여성의 모든 권리는 남편에게 넘어갔다.

오랫동안 결혼은 남편이 아내의 합법적인 주인임을 인정받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법률적 남녀평등과 여성의 교육 수준 및 경제적 능력이 향상된 오늘날, 여성은 변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와 남성은 여성의 변화를 수용하고 적응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여성과 성 연구소에 재직중인 원로 여성학자 매릴린 옐롬의 ‘아내’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서구의 실존 여성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제도와 관습을 조망하면서 결혼과 아내상의 변화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아내의 개념과 지위, 역할 등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설명해 나간다.

고대와 중세에 속박의 삶을 살아온 아내의 지위는 종교개혁 이후 다소 나아졌다.

청교도 가운데 많은 남성들이 아내를 때리는 것을 금지해 과거의 가부장적 관행보다는 진일보했고, 적어도 상류층 여성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남편 후보자들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었고 가장 마음에 드는 남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동반자적 부부관계는 프랑스혁명과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엄격한 도덕 풍토 아래서 신분, 재산 등 이해관계보다는 사랑이 결혼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여성의 독립과 자율은 ‘서부 개척’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여성’들의 남녀 평등을 요구하는 줄기찬 목소리는 수많은 장애에 부딪혀 꺾이는 듯 했다. 이후 예기치 않게 찾아온 기회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터로 간 남자들의 빈자리를 여성들이 채우면서 여성 노동과 고용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다. 또 여성의 사회활동이 강조되자 자연스럽게 피임과 육아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됐고, 성문화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저자를 따라 남편의 재산이었던 고대부터 슈퍼 우먼이기를 요구받는 오늘날까지 아내의 역사를 조망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수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고대 로마의 결혼식 절차와 풍속, 중세의 결혼 첫날밤 풍경, 남자가 고백하기 전에는 여자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연애 규범, 프랑스 혁명기의 귀족 부인들이 경험한 고난, 미국 남부 대농장의 풍속, 20세기 미국 여성들의 성 풍속, 고대부터 오늘날까지의 다양한 피임법 등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시공사刊, 이호영 옮김. 728쪽.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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