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7-23 18:58:10
14) 7년 가꾼 순정의 꽃
공포의 함정일 수도 있겠지만, 행복의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도 있을터였다. 이만성은 앞의 함정보다 뒤의 함정을 선택하는 쪽으로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오동포동 터질 듯이 무르익은 김영선의 육체라는 이름의 공격무기를, 눈곱만큼도 꿀림 없이 야무지게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태풍보다도 거세게 헉헉거리는 입술을 휘둘러서,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 위를 빗발치듯 비비고 핥고 물어뜯고… 만신창이가 되든 말든 아랑곳함이 없이 무자비하게 짓이겨대고 있엇다.
김영선의 가슴속에도 이만성의 가슴속에도 보이지 않는 똑닥선들이 홧홧 불을 뿜으며 종횡무애로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깊은 밤 마을 어귀 노상에서 우스꽝스런 도깨비 놀음인줄도 모르고 삶과 죽음을 초월한 무아의 황홀경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70년과 맞먹는 7년만의 해후(邂逅)-이것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아닌 꿈이고 꿈 아닌 현실이었다.
고전(古典)속의 남가일몽(南柯一夢)은 허무맹랑한 ‘부귀영화’였지만, 이만성과 김영선의 합작으로 엮어내는 한남일몽(韓男一夢)은 ‘꿈나무의 결실’을 안겨주는 축복 받을 신(神)의 선물일 터였다.
5시간보다 긴 5분동안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성은 구축이 되었다. 이윽고, 두사람은 하나로 묶였던 덩어리를 풀고, 저마다 한발짝 씩 물러나 별개의 자리를 확보함과 동시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7년 가뭄에 단비가 내린 셈인가? 우리는 소원성취를 한게야. 가끔 만나기로 하자, 응!”
이만성이 주위를 휘 둘러보고 나서, 마른 입술 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7년만에 생포한 도망자를 나의 가슴속 감옥에서 풀어주지 않을 거예요, 아셨죠?”
“김영선의 감옥에 갇힌 영원한 죄수란 말이지? 탈옥하지 않으면 될 것 아냐. 자, 너무 시간이 늦었어. 각자 귀가했다가 내일이나 모레쯤 만나기로 하지! 다음번엔 조용히 방안에서…”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밤은 이렇게 하자구요. 오빠가 우리 집으로 가시든가 아니, 제가 오빠네 집으로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김영선은 붙잡겠다는 듯 두손을 내두르며 흥분된 목소리로, 당조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뉴월 서릿발같지는 않지만, 심상찮은 분위기다. 이만성은 당혹한 나머지 잠시 멍해 있다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우리 집으로 함께 가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거리도 멀고 엄격하신 아버님 뵙기도 그렇구…” 난색을 나타내자 “오빠하고 함께라면 달미동이 뭐가 멀어요? 천리길도 마다 안할건데…. 하지만, 부모님이 놀라실테니까 이렇게 하시죠!”
하고 이만성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끝에 “저의 집으로 가시는 거예요. 어머니 혼자 계시고…걱정 안하셔도 된단 말예요. 이번이 두 번째니까 사양하실 것 없잖아요? 혹시 첫날밤 일을 기억하고 계세요?”하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따져 묻는 것이었다.
“뭐야? 첫날밤 일? 도대체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정말 잊었단 말인가요? 아니면 시치미를 떼시느라구?”
“잊다니? 시침을 떼다니?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잖아? 이거…”
이만성은 툭 쏘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소리가 왜 쏟아져 나왔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7년 전이라면 그녀의 나이 고작 10살 안팎인데, 열대지방의 10살배기 흑인소녀라면 모르지만, 조선 땅의 10살배기 시골소녀가 사랑에 눈을 떴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긴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백에 하나 천에 하나 조숙하고 싹수가 노란 여자애가 없으란 법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김영선도 그 때 이미 엉덩이에 뿔이 나 있었다는 얘기인가? 그래서 짝사랑 해 왔다구?
“7년전 그날밤, 그러니까 제가 영재의숙 3학년때 얘기가 된다구요. 나이는 10살이구…”
7년전 그날 밤이라니…? 그녀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기에, 저토록 야멸차게 물고늘어지자는 속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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