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7-29 19:11:51
(2) ‘낮에 뜬 별’들의 행진
여자의 비명소리는 30여m 떨어진 언덕빼기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만성은 공격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무턱대고 뛰었다. 피비린내 풍기는 겁탈극은 숲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사, 사람 살, 살려! 날 한저 살려줍서 예!”
숨막히는 비명소리는 이성을 잃은 이만성의 몸과 마음을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만성은 불 속으로 뛰어든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탐색’이 먼저라고 누군가 등뒤에서 깨우치는 것같은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사건현장까지는 10여m-이만성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인기척에 놀란 듯 3명의 일본군인들은 몸짓을 멈추고 이만성에게 눈길을 돌렸다. 광기가 번뜩이는 성난 짐승들의 눈빛이었다.
그들은 여자아이 하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요리솜씨 발휘하기 위해, 비장의 무기를 꺼내고 있는 중이었다. 여자아이의 얼굴은 녀석들의 그림자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찢겨진 옷가지들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고, 땅바닥을 구르는 벌거벗은 아랫도리 일부가 풀잎 사이로 눈길을 끌어당겼다.
막 시작하려던 참인지, 한탕이나 두탕쯤 치른 뒤였는지는 가늠할 수 가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구나! 대명천지 밝은 대낮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다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하늘을 대신해서 내가 응징해 줄테다!”
이만성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총알 같이 돌진하려다 태산모양 도사리고 섰다.
“에잇,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쓰레기들아! 어서 그 여자애를 돌려보내지 못하겠느냐? 셋까지 세어서 여자애를 놔 준 다음, 무릎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너희 직속상관 만나서 엄중 항의 할테다. 자, 하나·둘·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태도는 한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너는 실컷 떠들어라, 우리는 먹던 떡 마저 먹어치우련다! 식의 배짱이다.
“이게 왠 강아지 짖는 소리냐? 죽으려고 환장한 놈 다 보는군! 명 재촉하러 왔나본데, 야 이놈아! 이 계집애가 너와 함께 죽자살자 사랑을 속삭이던 애인이라도 되냐? 설령 애인이라손 치더라도, 선심 쓸 줄 모르면 양보할 줄은 알아야잖아? 목숨을 내걸고 천황폐하를 위해 그리고 황국신민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갸륵한 일본군인에게 주전부리시켜줬다 해서 닳아질 물건도 아닌데, 너무 인색하게 놀고 있잖아? 모처럼 좋은 일 하고 있는 터에 산통 깨지 말고 썩 물러가지 못하겠냐? 너야말로 셋까지 세기 전에 사라지지 않으면 우리들의 손에 죽더라도 후회하지 말아라. 응! 자-하나·둘·셋!”
“아쭈, 제법이군! 흉내도 잘 내고 있는 걸 보면 말 갖고는 안 되겠는걸! 으야앗!”
이만성은 함성을올 리며 비호같이 달려나갔다. 그들도 동시에 맞불작전으로 나왔다. 뒤죽박죽 얽히고 설키면서 언덕 밑 숲 속은 삽시간에 혈투의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놈들 중에 유도의 고단자 하나가 끼여있었기에 싸움은 막상막하에서 좀처럼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1승1패, 이만성이 녀석을 때려뉘었다고 생각하기 바쁘게, 자신이 땅바닥을 구르곤하면서…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뿐이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건 이만성 쪽이었다.
2개의 장애물-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이만성의 속을 썩이는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거머리처럼 등뒤로 달라붙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곤 하면서, 이만성으로 하여금 실력발휘를 못하도록 철저히 훼방을 놓는 탓이었다.
그렇잖아도 이만성은 기진맥진 힘이 빠져있는 상태였는데, 느닷없이 아름드리 돌덩이가 거깻죽지를 지리친 발람에 풀썩 고꾸라지고 말았다.
언제 내뺏는지 여자애는 보이지 않았고….
“쥐새끼 같은 년, 도망쳤잖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에잇 재수없어!”
입맛을 쩝쩝 다셔가며 3명의 군인들은 울상을 짓고, 핏발 선 탐색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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