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신의 실크로드기행
차창밖엔 거대한 옥수수밭
시민일보
| 2003-08-16 14:07:23
전쟁이 시작됐다.
사람을 죽이고 죽이는 그런 전쟁이 아니다.
기차 안에서 아기들 울어대고 어른들 먹어대고 떠드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 바로 윗칸에 있는 허리 사이즈가 족히 40인치는 넘을 듯한 사나이는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하루종일 먹어댔다.
게다가 간식으로 그 큰 수박이나 하미과를 한 통씩 먹어대고 그러면서 식사시간에는 남들의 두 세배의 양을 혼자서 무자비하게 먹기만 했다.
그 사람에게는 먹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의 즐거움이 없는 듯 보였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윗칸에 있는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 찌꺼기와 휴지를 아래로 마구 던지는가 하면 음식을 먹은 다음 내 코앞에서 트림을 하는 아줌마는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다.
아무래도 이러한 전쟁은 모두가 잠을 자야 끝날 것 같다.
잠을 자지 않으면 열차 승무원이 전등을 모조리 꺼버릴 테니 모두들 틀림없이 잠을 잘 것이다.
그동안 기차여행을 하면서 대부분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는 기쁨을 만끽했는데 서울이 다가오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즈벡키스탄 테르메즈에서 타직크스탄 두산베로 입국하면서 엄청나게 큰 옥수수 밭을 지나쳤는데 그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지나며 타작을 하기에 손놀림이 바쁜 농부들과 그 옆을 스치는 목동들은 빼놓을 수 없는 정경이었다.
만약 이처럼 풍성한 들녁의 모습이 없었더라면 갈색의 무너질 듯한 벽돌집과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폐한 산과 말라붙어 버린 땅을 보며 고리타분하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중국의 실크로드를 따라 기차여행 할 땐 언제나 이러한 모습이 있어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턱이 아프도록, 팔이 저리도록 해가 질 때까지 창 밖의 정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기쁨을 누가 알겠는가!
잠시후면 내가 처음 기차여행을 시작한 서안을 지나게 된다.
하루종일 나를 괴롭혔던 윗칸에 있는 두 명의 아줌마와 아이들이 중간에 내리는 행운을 얻어 이번 기차여행의 마지막 밤인 오늘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울러 혼자서 폼 잡으면서 맥주한잔 해도 어울리는 밤이 될지 모른다.
여행전문가 kapabah@chollian.net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