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10-06 17:29:54

(6) 큰나무, 설땅이 없다

실종사건은 목포행 연락선 안에서...오진구는 숨이 차니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어, 움찔 몸을 떨며 주춤거렸다. 이때였다.

“잠, 잠깐 오진구 부장!”하고, 오진구의 발언에 재동을 건 사람은 고정관이었다. 강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목소리였기에, 오진구는 눈을 크게 뜨고 고정관의 얼굴을 노려보면서 “왜 그러세요, 고위원장님?” 하고 윗몸을 움츠리면서도 퉁명스런 목소리로 맞불질 하듯 캐어물었다.

“탐정소설 얘기는 물론 아닐 테구...김대호 선생이 연락선 안에서 실종되다니? 그런 엄청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그 얘기를 왜 뒤늦게 이제 와서 꺼낸 거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들은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면서 일각이 여삼추로, 눈이 빠지게 그분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었는데...”

고정관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떠들어대며 화풀이하듯 애꿎은 오진구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방안의 분위기가 침통해졌다.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슬픔과 절망의 벌판으로 바뀌었다. 아, 두 번 다시 뵐 수 없는 김대호 선생- 방안의 사라들은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연실색, 말문이 꽉 막히고 말았다. 넋을 잃은 채 귀기 어린 울들이 방안의 분위기를 한층 더 어둡고 음산하게 해주고 있었다.

“사실은 저도 내막을 확실히 알 수가 없어요. 여태까지 돌아오시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실종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연락선 안에서 어떻게 되신 건지 아니면 혼자 상경하신 다음, 경성에서 행방을 감추신 건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가뜩이나 주눅이 든 얼굴인데다 방안의 분위기가 살벌해진 탓인지, 오진구의 떨리는 목소리엔 나사가 풀린 것처럼 맥이 빠져있었다.

“그럼, 오부장보다 그 내막은 윤기자가 더 잘 알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김대호선생과 연락선에 함께 탔었다니 말이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조용석이 울화가 치밀어 더는 견딜 수 없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다 말고 떨리는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각오를 하고 있었던 덧처럼, 윤기자가 숙였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올바로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윤기자로부터 전해들었을 뿐이니까요. 자, 그럼 윤기자가 아는 데까지 자세히 말씀드리라구!” 오진구는 얼씨구나 하고 꽁무니를 빼면서, 윤기자에게 후딱 바통을 넘겼다.

“그러잖아도 제가 말씀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겸사로 오늘 여러 선배님들을 찾아뵙게 된 거구요. 이 자리를 빌어서 제가 사건현장에서 겪은 체험담과 목격담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머리를 끄집어낸 윤기자는 김대호선생과 함께 연락선을 타고 목포로 가던 도중, 선실안에서 일어난 괴상망측한 사건의 진상에 대해 몸소 겪은 대로 한 점도 의혹이 없게 있었던 그대로 펼쳐 보일 것을 다짐했다. 24일 저녁 5시, 비공식적으로 윤기자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김대호선생은 출장기간을 6일간으로 잡고 상경길에 올랐다.

2일에 한번 격일제로 운항되는 여객선이어서, 정원의 3배 이상 승객들을 태웠기 때문에 선실안은 글자그대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3등실은 말할 것 없고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2등실에 탄 두사람은 이리밀리고 저리밀리고 하다가 멀찍이 떨어진 지점에 각각 자리를 잡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자리를 잡기 바쁘게 큰 대자 꼴로 드러누웠다. 8일보다도 길고 지루한 8시간의 힘겨운 항해를 견뎌내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드러눕기 작전을 능수능란하게 펼치게 되어있는 것이, 생존경쟁의 철칙처럼 돼 있는 그 바닥 특유의 풍속도였다. 두 사람도 성현의 말대로 ‘종기속(從基俗)’을 실천에 옮긴 셈이었다.

연락선은 승객들에게 고통 안겨주는 것을 직업적인 낙인 양, 쥐어짜며 헹가래치며 잔인한 광란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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