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11-05 18:24:31

(12) 위장진지로 가는 길
5분이면 된다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서병천은 무슨일로 어디를 나갔는지? 휴식을 취하면서도 방안의 사람들은 약간은 불안감을 곁들인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서병천이 차지한 비주이 그만큼 컸었다는 얘기일까? 방안은 온통 빈자리뿐인 것처럼 적막감을 자아낼 정도로 휑뎅그렁하다. 빠져나간 사람은 한 사람 뿐이건만, 열 사람이 무더기로 빠져 나가버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걸맞다.

“서병천 동지는 어디를 가셨지? 지루하고 답답하다 해서 바람쐬러 나갔을 것 같지는 않구...이건 저의 사견입니다만, 양형과 부형! 두 분은 누추하지만 당분간 저희 집에 머물면서 저하고 함께 일하시면 어떨까요? 기왕 오셨으니까 저를 좀 도와주시지요. 저에겐 두 분이 꼭 필요합니다. 선배님들 이해하실 수 있겠지요?” 김순익이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떨리는 목소리로 엉뚱한 말을 터뜨렸다.

“김순익동지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파격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서 부럽다니까. 다혈질인데다 의욕과 정열이 넘쳐서 탈이긴 하지만... 자제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 때엔 발병의 소지가 없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므로, 유의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만성이 입을 삐죽거리며 꼬집는 것 같은 목소리로 다분히 비웃음의 뉘앙스를 풍겼지만, 알고 보면 노파심에서 던진 충고의 말이었다.

“이만성 동지도 농담조로 윽박지른 것은 아니라고 봐요. 사실 김순익동지 같은 특공대 기질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색다른 친구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런 일이라니까. 양동지와 부동지 또한 말할 나위가 없고, 그래서 제주땅의 앞날은 더 없이 밝다고 낙관해도 좋을 것 같아요”

여태껏 남을 치켜올리는 데 인색한 조용석의 입에서 값진 찬사가 터뜨려졌으므로, 김순익으로서는 춤이라도 추고싶을 정도로 부푼 기분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양동지와 부동지의 입장은 어떠신지? 먼저 두분의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 순서인데, 이쪽 입장만 내세워서 협조를 청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때가 때인만큼 신좌면 안에서는 보나마나 뒤숭숭한 분위기가 휩쓸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구. 누가 김모 면장을 타도했을까? 하고 주변사람들이 눈에 쌍불을 켜고 탐색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만약 두 분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면 주목받을 염려도 없지않다고 볼 수 있어요. 두 분께서 이쪽으로 건너올 때 나름대로 계획 같은 게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 대목은 좀 얘기해 주셨으면 싶어요”


고정관은 두 사람의 거취와 처신 등에 관해 진지한 모습으로 물으며 사려 깊은 신중론과 함께 우려를 나타냈다.

“잘 알겠습니다. 선배님의 말씀... 그러나 염려 놓으십시오. 고향에서 애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돌아다니는 정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수상쩍은 낌새가 포착되면 제꺽 이쪽으로 연락이 닿게끔 되어 있습니다. 저나 이 아우는 어디를 가든 오든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상태지요. 그렇다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 탓에 죄의식 같은걸 느껴보지 못했습니다만,

얼마 동안은 자숙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은신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아요. 하지만 어차피 집을 뛰쳐나왔으니까 숙소를 마련할 필요는 있겠지요. 그런데, 때마침 이 도선 마을에는 진외가 댁 즉 할머니의 친정이 있어서 할머니 쪽 친척도 찾아뵐 생각입니다. 김순익 동지와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데도 여건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여러 선배님들께 심려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양윤근의 말이었다. 뒤이어 부종운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죄를 짓고 두려운 생각에서 피란 나온 게 아니고, B일보 기사를 읽고 나서 훌륭한 선배님들이 계신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많은 얘기를 늘어놓자는 것일까? 부종운의 얼굴에 비장한 그 무엇이 눈에 띄게 서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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