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12-10 17:35:19

(7) 군중소리 발포소리
서원형노인이 복받치는 숨결을 가다듬느라 잠시 얘기를 멈췄을 순간이었다. 청중들도 치미는 감정을 속으로 삭이느라 몸을 뒤척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착 가라앉았던 강연장안은 돌멩이를 던졌을 때의 호수처럼 가볍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운동장쪽에서 현관문을 박차고 인파속을 헤집으며 헐레벌떡 강당안으로 뛰어든 사나이가 있었다.

아니, 미쳤나? 저 친구가…. 강연장안의 청중들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삼킬 듯이 사나이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20세 안팎으로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몸매가 날쌔보이는 그 사나이는 돌진하는 자세로, 김순익이 앉아있는 연단근처로 다가가서 우뚝 멈춰섰다. 청중들의 시선은 따갑게 사나이의 얼굴위로 쏠렸다.

사나이도 청중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잠시 머뭇거린 끝에 허리를 꾸부리고, 김순익의 한쪽 귀에다 자신의 입을 바싹 들이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혹시 외부에 심각한 상태라도 벌어진 것일까? 청중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군침 삼키기에 바빴다. 귓속말을 듣고 잇는 김순익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변화무쌍 험상궂게 일그러지고 있어서, 다분히 심상찮은 소식이 전달되었음을 청중들은 낌새를 챌 수 있었다.

“그럴줄 알았지. 들키지 않게 먼 발치로 추적을 하는게야! 꾸물거리지 말고 뛰쳐나가보라구!”

김순익이 엉겁결에 꾸짖는 듯한 목소리로 지시를 했다. 그도 사나이의 귀에 입을 대고 은밀히 속삭이듯 일러준다는 것이, 가슴이 격하게 뛰는 바람에 솟구친 억양을 가누어잡지 못하고, 몇몇사람들의 귀에 들릴 정도로 볼멘소리를 터뜨린 터였다.

순간 사나이는 얼굴이 핼쑥해지면서 알았노라는 신호로 고개를 꾸벅하고, 비호같이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귀엣말을 나눈 문제의 사나이, 그는 김순익의 한쪽팔 구실을 맡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심복이었다. 그는 같은 또래의 세청년들과 더불어 강연장 안팎을 물샐 틈 없이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청중들의 일거일동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강연장안에서 김순익의 짤막한 연설이 끝나고, 서노인의 강연이 시종일관 열기를 뿜어올리다 최고봉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더는 눈허리가 시어서 아니 귀가 따가워서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유리창가까이로 바싹 귀를 들이대고 강연을 엿듣고 있던 20대 청년 하나가 획 등을 돌리고 주위를 휘 둘러본 다음, 네굽을 놓아 정문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누가 보더라도 의문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수상쩍은 몸짓이었다. 강연장 앞팎이 청중들은 서노인의 청산유수 같은 열띤 강연에 흠뻑 매료되어 있었기에 청중 속에서 누가 빠져나가고 누가 끼여들었는지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감시임무를 맡은 김순익의 심복은 철통같은 경게망를 폈었으므로, 아,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고 먼 발치로 뒤를 따라나섰던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대로 비밀첩자의 임무를 띤 사나이, 그는 강연장을 뛰쳐나간 다음 자신의 집에 들러 자전거를 집어타고 한길로 나와서, 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관광면장에게 위급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면소재지인 관광마을로 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김순익의 심복은 강연장으로 되돌아와서 상정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긴급보고를 한 셈이었다.

김순익주최 강연회가 도선마을 향사에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지만, 바로 그 무렵 도선마을과 관광마을 사이에서는 숨막히는 죽음의 첩보전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렇듯 멀리서 가까이서 목을 조르는 긴장감이 살기를 돋우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자아내고 있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연장 안팎의 상황에 아직 이렇다할 변화의 조짐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서노인의 열변은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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