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민란
시민일보
| 2003-12-16 19:11:52
(11) 군중소리 발포소리
“지금은 소화(昭和) 20년이 아니야. 소화 20년은 일본천황이 무릎꿇고 항복했던 날인 8월15일을 기해 물건너갔으니까.
그래서 우리 조선사람들은 대한민국 27년이자 단군기원 4278년임과 동시에 을유년이고 서기(西紀)로는 1945년을 맞았지.
일본인들이 조선땅에서 물러났듯이 친일파-민족반역자들도 그네들의 꽁무니를 따라가야 옳은일 아니겠어?
일본인들의 꽁무니 따라가지 못한 따라지 신세라면 쥐구멍 속으로 숨든가, 그것 역시 여의치 않았다면 숨 죽이고 자숙하고 속죄 해야잖겠어?
그리고 어쩌다 벼락감투를 쓸 수 있는 행운을 맞이했다 해도, 겸손한 태도로 사양할 줄 알아야 잖아. 제 앞으로 돌아가지도 않을 떡을 덥석 집어먹었다면 그건 이미 인간임을 포기한자로서 개·돼지의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이종상, 저자는 인간이 아니라구, 굳이 인간이라고 강변한다면 비인간, 잔인하기 짝 없는 지옥의 악마같은 존재라고 해야겠지? 1만5000명 관광면민의 얼굴에 시궁창의 썩은 물 끼얹은 악마 같은자를 면장자리에서 끌어내야 해!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면민에게 유리한 일이란 말야!”
모든 사람들의 상식을 뒤엎어 눈 깜짝하는 사이 면장으로 둔갑한 이종상의 존재는 유독 관광마을의 유지급 인사들에게 공포의 대상 아닌 증오의 대상으로 앉으나 서나 자나깨나 피말리는 압박감을 안겨주고 있음이 사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이를 갈며 눈물겹도록 속 앓이를 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양규일(梁圭一.48)-그는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퍼진 직후 제주땅에 ‘건준’이 등장함과 때를 같이해서, 지방유지들의 요구로 ‘지방건준’의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한때 면사무소에서 총무직과 회계원직을 맡아 면민의 살림살이를 청렴과 결백을 모토로 알뜰히 꾸려오는 동안, 면민들로부터 신뢰와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면장의 지시를 받는 하위직에 불과했지만, 면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엔 실질적인 면장인 셈이었고 한남마을 이양국(이만성의 아버지)과 쌍벽을 이루는 1만5000명 면민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일제시대에야 비뚤어진 강압정책 탓으로, 이양국이나 양규일에게 돌아갔어야 옳을 면장직이 비켜가기만 했었다 치더라도, 왜곡된 관행이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정상궤도로 진입을 못하고 갈팡질팡 겉돈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것을 바로잡을 책임이 면민들에게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양규일은 멀거니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잠시 깜짝하는 사이 코를 베어가 버린 날강도를 떠올리자, 문득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는 말을 함께 되씹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허망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박탈감과 패배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날 동안 외출을 자제하고, 자신의 집에 들락거리며 위로해 주는 몇몇 유지들과 술잔 기울이는 것이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날, 4명의 젊은 불청객들이 야음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들이닥쳤다. 양규일은 불청객이라는 점에 놀랐지만,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젊은이들이어서 반가움이 앞섰다.
“어서 오게 김군!, 그리고 강군도…”
양규일은 툇마루로 나서며 그들을 반겨 맞았다. 그들은 곧 응접실안으로 안내되었다.
“이 두사람은 보통학교 동창들입니다. ‘십오리마을’ 친구들입니다”
김군이라는 청년이 소개하자 낮선 두 청년이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시간이 없어놔서 긴 말슴 드릴 수가 없군요. 김순익 동지가 직접 찾아뵈려 했으나 워낙 바빠서 저희들에게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이거 읽어보시고 답장을 써 주시지요!”
김군이라는 청년이 쪽지를 내밀었다. 어제 오후 도선마을에서 강연이 끝나자 10여명의 중견청년들과 함께 김순익의 집으로 동행했던 4명의 특공대원,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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