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시민일보

| 2003-12-17 19:21:52

입을 다문 채 눈으로 쪽지를 읽는 양규일 고문의 얼굴은 굳어졌고, 가슴이 격하게 벌렁거리는 탓일까 숨소리가 씨근벌떡하니 거세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4명의 특공대원들은 짓궂게 곁눈질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쪽지에는 면민들의 이름으로 내걸게 되는 요구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조목조목 기재되어 있음을 특공대원들도 익히 알고있는 터였다.
①우리 面民들은 李鐘祥씨가 親日派-民族반역자라는 점에서, 그를 管光面長으로 인정할 수 없다.
②過渡期를 틈타 얼렁뚱땅 面長織을 가로챈 李종상씨는 1만5천명 面民앞에 무릎꿇고 사죄하고 즉각 辭退하라.
③악독한 日帝의 조무래기 꼭두각시로 놀아나면서 관광면 商權을 독차지하고, 면민들을 착취해서 긁어모은 재산을 몽땅 면민에게 되돌려줘라
④당장 보따리 싸고 管光面을 떠나라
⑤위와 같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일어나는 최악의 불상사에 대해, 면민들은 일절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둔다.
위의 5개 요구사항은 어젯밤 도선마을 김순익의 집에서 있은 작전회의에서 결의된 것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 밖에 양규일 고문에게 정중히 그리고 간곡히 당부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면민 궐기대회에 참가할 군중동원 문제였다. 양규일 고문은 ‘건준’ 지방책임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긴 해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실질적 운영은 오로지 양고문의 몫이었다. 양 고문이 맘만 먹는다면 1만5000명 면민을 동원하는 것쯤 누워서 떡먹기와 다를 바 엄을터였다. 그런데도 그는 맘속으로 내키지가 않았다.
“D데이가 10일로 되었다니 코앞에 닥친 셈이군. 면민을 동원하는 건 어려울게 없지만, 내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오해를 받기 쉬울텐데, 그점이 곤란하단 말야. 남의말 하기 좋다구… 이 양규일이가 면장자리를 탐내오 우격다짐으로 빼앗으려구 젊은이들에게 충동질 했다는, 비난을 받기에 안성맞춤일터이구…. 뭐,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
양규일은 더듬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특공대원들은 양규일의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긴커녕 선뜻 공감을 했다.

“고문님! 면민의 이름으로 내걸게 된 요구사항은 괜찮겠습니까? 고문님이 군중동원에 나서기가 곤란할 것 같으면 달리 방법을 찾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여겨집니다만…”
김이라는 사나이의 말이었다. 나머지 세사람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들을 끄덕거렸다.
“문제의 요구사항은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강한 뉘앙스를 풍기고는 있어도, 따지고 보면 상대가 보기 드물게 철면피한 족속이고 보면 그런대로 무난하리라고 볼 수도 있지! 그런데, 자네들 생각으로 달리 동원방법이 있다니 그게 어떤 방법인지 얘기해 줄 수 없나?” 은근한 목소리로 양규일이 슬쩍 되물었다.
“김순익 동지와 긴밀히 협의해서 결정할 문제입니다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친일파 악질면장 쫓아내자고 외치고, 면민들의 손으로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참신한 면장을 뽑음과 동시에, 친일파 이종상이 수탈해간 양곡을 면민들에게 되돌려 준다고 다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면민들의 손으로 양곡을 나눠갖게 될테니 빠짐없이 참가하라면 반대할 사람을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김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자세로 씹어뱉었다.
“네, 그게 좋겠습니다.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군요. 고문님은 군중동원문제에 신경쓰시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강이라는 사나이가 김의 말에 비위맞추듯 맞장구를 했다.
들러리 격인 2명의 특공대원들도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규일의 말은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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