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4-01-10 16:47:11

“관광면에서 일어난 미군발포사건은 평온한 사회분위기를 성난 파도가 일렁거리는 거칠고 험난한 망망대해로 바꿔놓았다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습니다. 허공에 대고 공포 몇 발만 쏘아도 쥐구멍 찾는 한심한 족속들이구나! 승전국의 군대는 주둔국에서 어떤 종류의 횡포를 부려도 무사통과하니까! 이것이 그네들에게 천상과 천하에서 ‘유아독존’이라는 정복자로서의 긍지를 심어준, 꼬투리가 되었다고 보아야겠지요? 죽음보다도 아픔, 약자의 설움을 그네들은 값진 선물인양 관광면민들에게 본보기로 안겨준 셈이기도 하구요!”

서병천이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였다. 회의실 안에 뺑 둘러앉은 굳어진 얼굴들 속에서 번쩍 손을 든 사람, 그는 신좌면(新左面) 함주마을에서 온 세사람 중 한사람인 장지태 였다.

갑자기 발언을 멈춘 서병천은 말할 것 없고 좌중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지태의 얼굴위로 쏠렸다.

“죄송합니다. 선배님의 말씀을 방해해서…. 다름이 아니고 어제 있었던 미군발포사건을 저는 이렇게 보고 싶습니다. 물론 이종상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몰지각한 불장난이라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양면성을 띤 이상야릇한 사건이자 덤으로 다른 하나의 얼굴을 지닌, 매우 복잡한 사건이 아닌가고 느껴집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면장타도사건은 관광면을 시발로 제주도내 각처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그네들은 내다보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확산되기 전에 예방조치의 일환으로, 과잉진압이라는 본때를 보여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이 아니고,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비한답시고,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고 서둘러 손을 썼던 것이 방업론상의 결함을 슬기롭게 미봉하지 못한 데서, 화근을 빚게 된 셈이라고 봅니다.
그뿐만도 아니지요. 분명 도화선이 흘려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며칠전에 일어난 신좌면장 피살사건을 도외시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죽음에 대해 속으로 쾌재를 불러야 할 그네들이 적과 아군을 구별 못하고, 총부리를 겨냥해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잇는 셈이므로, 엄격히 말한다면 그네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 왜 목숨바쳐 싸웠는지가 궁금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이 이쯤되고 보니, 살판나는 세상을 만났다고 춤을 추는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역습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친일파들이 새시대의 주역으로 각광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자, 눈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여러 선배님들의 고견을 더 듣고 싶습니다”

비록 목소리는 떨려나왔지만, 분노한 얼굴 살기등등한 눈빛은 도민의 속적인 친일파를 단칼에 해치우고 말겠다는 서슬퍼런 앙심을 내보여주고 있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소. 민주군대라고 별 수 있겠소? 식민지에서 노예같은 생활을 해온 족속들에게 민의고 나발이고 있을턱이 없다는 고정관념, 그게 탈이지 따로 뭐가 있겠어? 슬기로운 대응책이상의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지요. 공산주의라고 하면 정색을 할까? 그네들을 긴장시킬 수 있는 묘책이 당장은 있을 것 같지가 않으니까 그게 문제란 말야!”

좌익쪽으로 기울어져 온 조용석은 이 시점에서 아무런 처방전이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공산주의’를 들먹였다.

그러나 그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 서병천동지 아까 중단한 얘기 다시 계속해 보세요!”

고정관이 머쓱해진 얼굴로 조용석을 바라보다 시선을 서병천에게 던졌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최근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