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4-01-12 16:52:11

서병천은 내심 기다리고 잇었던터라 고정관의 재촉이 떨어지기 바쁘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말씀을 계속하겠습니다. 선배님과 동지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제주도를 한 지역 아닌 3천리 강토의 축소판이라고 규정짓고 싶습니다.
따라서 관광면에서 무장군인 발표사건은 면민만의 상대 아닌 우리 민족 전체를 상대로 한, 그래서 국토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불상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서 몸소 겪은 사람들은 오로지 관광면민들 뿐이었지요. 직접적인 피해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관광면민전체요. 이 자리에 모여앉은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도 명색이 사내자식으로서 이번의 일을 어물쩍 넘겨버리고 싶지 않아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맞서 싸우는 길밖에 달리 묘안은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렇다해서 무력으로 맞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고, 성명전(聲名戰)을 벌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1만5천명 관광면민의 이름으로 제주의 B일보에다 미군정책임자에게 보내는 성명서을 싣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서병천은 자신의 복안을 말하고 좌중의 의사를 타진하는 절차를 거치기 위해 일단 말을 멈추었다. 이미 충격을 받은 듯 회의실안의 사람들은 굳어진 얼굴에 한결같이 왕방울 같은 눈망울을 번뜩이기에 바빴다.

“아주 기발한 생각이오. 어떤 내용의 성명서가 될 것인지 그 대목은 알 수 없지만, 차원 높은 발상임에 틀림없다고 봐요. 다른 분들의 의향은 어떤지 모르지만…”

고정관이 정색을 하고 감탄하는 목소리로 동의를 했다.

“물어볼 것 뭐 있습니까? 모두 찬성한다고 얼굴에 씌어져 있는 걸요”

조용석의 뒷북치는 말에 “부끄럽습니다. 우리 모두의 머릿속에서 진작 그런 발상이 나왔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를 못해서…”

이만성이 맞장구를 치자 나머지 사람들은 굳게 입을 다문채 짝짝짝 손뼉을 쳤다. 서병천은 하늘을 날고픈 심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고맙습니다. 이제 저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더욱 분발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구상한 성명성의 골자를 여러분 앞에 개진하고, 한차례 심의과정을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서병천은 호주머니 속의 수첩을 꺼내 펼쳤다. 그의 수첩속에 적혀있는 항목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세계 제1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세계 제1의 막강한 민주 군대가 선량한 면민들의 규탄대상인 친일파의 편에 서서, 평화적인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비록 위협발사엿지만)를 했다는 사실앞에, 우리는 분노이전에 경멸을 금할 수 없다.

②면민들은 목숨이 아까워서 총부리가 두려운 나머지 실없이 해산한 게 아니고, 상대하기 싫은 한심한 대상이라고 실망한 끝에, 침을 뱉고 되돌아서버린 심정을 터득하기 바란다.

③친일파는 제2차 대전에 즈음해 일본군을 상대로 양곡·징용·위안부공출 등 뒷받침해온 자들이 아니가? 그렇다면 미군은 일본군을 몰아내듯 친일파도 등을 떼밀고 내쫓았어야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선량한 국민의 적인 친일파의 편에 서서, 총칼을 커꾸로 민중에게 돌린대서야 체면이 설 수 있겠는가? 후진국의 ‘오합지졸’ 같은 군대라면 몰라도….

서병천이 낭독하는 성명서 초안의 뼈대들은 아직도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김순익 등 몇몇사람들은 메모용지에 받아쓰기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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