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는 관습이 아니라 정책이다

김 부 겸 국회의원

시민일보

| 2004-10-26 20:02:32

{ILINK:1}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 헌정사에서 아직도 우리가 혼돈스럽고 미숙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헌법적 질서, 헌법에 입각한 권력 분립, 헌법을 준수한 절차, 이 모든 것이 아직은 멀었구나 싶었습니다.

그것이 또 이 시대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그것대로 받아들이자는 비장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헌재 결정문을 읽다가 중간 쯤에 ‘수도가 서울인 점이 우리나라의 관습헌법인지 여부’ 대목을 읽어내려 가다가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조 성종이 만든 경국대전에서 수도가 서울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600년간 서울이 수도였다는 건 쓰여있진 않지만 헌법 조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행정수도 이전은 천도인 만큼 헌법을 먼저 개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헌재가 그렇게 심판했으면 심판한대로 따라야지 뭘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헌재의 이번 결정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후퇴를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정치도 자세히 뜯어보면 이념(이데올로기)의 수준, 정치의 수준 그리고 정책의 수준, 이 세개가 어우러져 돌아가는 거지요.

이념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것 입니다. 세계관이나 가치관이지요.

물론 계급성도 내재합니다.

종교, 언론, 예술 분야도 이런 이념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정치는 그야말로 정치입니다.

권력, 선거, 정당, 법률, 제도 이런 것들입니다.

한 때 우리 정치는 3김정치, 지역주의 정치에 벗어나야 한다. 군사독재를 타도해야 한다. 정당개혁을 하고 정치관계법을 개정해야 한다. 뭐 그런 거지요.

마지막으로 정책은 사회경제적인 영역입니다. 성장, 축적, 분배, 치안, 복지 기타 등등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 세가지 수준을 우리가 다룰 때 각각 조금씩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좀 신중해야 하는 게 있고 팍팍 치고 나가야 할 게 있고, 타협해야 할 게 있고 타협보다는 자기 입장을 견결히 수호하는 게 나은 게 있고, 논쟁을 가급적 삼가는 게 좋은 것도 있고 논쟁을 치열하게 할수록 좋은 게 있고, 가급적 표현을 부드럽게 하는 게 좋은 것도 있고 대립점이 부각되도록 정확하게 말 하는 게 좋은 것도 있고….

그런데 바로 이번 ‘행정수도건설’ 같은 사안이 바로 세 번째 - 즉, 정책의 수준입니다.

정책은 그리고 아무리 논쟁을 치열하게 해도 좋은 것이고 정확하게 뜻이 드러나도록 말하는 게 좋은 것이고, 어중간한 타협보다는 자기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확고한 태도를 취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그걸 헌재가 나서서 판을 완전히 깨버린 겁니다.

그것도 경국대전 운운하면서요.

아니, 정책이 조선왕조에서의 정책이 다르고 대한민국의 정책이 다르고, ‘국민의 정부’가 다르고 ‘참여정부’가 다른 것이지 갑자기 웬 경국대전입니까?

이건 정책입니다.

목소리 높여서 좀 악악대도 괜찮고, 끊임없이 딴지 걸어도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고, 온갖 유식한 이론과 사례를 들먹여서 사람 피곤하게 해도 참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게 발전된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그걸 헌재가 일거에 닫아버린 것입니다.

정책적 판단은 사법의 영역이 아니라 입법부와 행정부의 영역입니다.

그게 우리 헌법의 원리인 삼권분립의 원칙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이번 심판은 헌재가 내려오지 말아야 할 정책의 영역까지 하강함으로써 헌재 역시 어쩔 수 없는 세속 정치의 한 행위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 헌재가 앞으로 엄청 바빠질 겁니다.

별별 건이 다 헌재로 올라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조선의 팔조금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헌재가 정책 사안에 대해 일일이 가부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저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당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토로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승복한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습니다.

그리고 국민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국정의 핵심은 국민적 동의를 확보하는 데 달려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겼습니다.

어쩌면 헌재의 깊은 뜻이 있다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 국민의 마음 속으로 더 깊이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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