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들, 오늘 이 사람들

이 명 원 (문학평론가)

시민일보

| 2005-02-24 19:46:46

{ILINK:1} 명절이 오면, 산에 오르곤 했다. 지난해의 설엔 북한산을 횡단했다. 올 해는 도봉산이었다. 설날이었건만, 의외로 등산객들이 가득했다. 아슬아슬한 바위절벽을 횡단하면서, 사는 것이 갑자기 상쾌하고 동시에 아찔했다.

그리고 다음날. 직장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극을 보는 것이 어떨는지. ‘지하철 1호선’을 잘 아실 것이다. 1994년 초연 이후 1000회 이상의 마라톤 공연을 한, 이제는 록 뮤지컬의 고전이 된 작품. ‘학전’에서 두 후배와 한 사람의 지인과 연극을 보았다. 공연 시간 두 시간 삼십 분. 의외의 십 분의 휴식 시간 동안 담배를 피웠다. 연극을 보고 나서, 나는 다소 피로해졌다.

이 연극은 한 조선족 처녀의 눈에 비친 서울의 만화경 같은 풍경이 리드미컬하게 역동적으로 극화된 작품이다. 앵벌이, 청소부, 창녀, 기둥서방, 가짜 운동권 학생, 곰보 얼굴의 포장마차의 주인 노파, 노숙자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인물들이 지하철 1호선, 특히 청량리 588 주변에서 악다구니처럼 보이기도 하고,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삶의 애환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극이 끝나고 내가 피로감에 빠진 것은, 일차적으로는 처음 본 이 뮤지컬이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본 사람들의 많은 수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의 오키나와에서 온 일본의 젊은이들이었는데, 그들 또한 연극이 끝나자 깊은 감동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피로감의 두 번째 이유는 극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조선족 처녀에 대한 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의 제비족에게 속아 임신을 하고, 무작정 연변을 떠나 한국의 588을 찾아온 이 처녀는 극이 전개되는 내내 순진성과 순수성의 태도를 견지한다. 이 극의 결말 역시 이 순수한 조선족 처녀가 악다구니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반납하는 듯하다가(제비족 청년의 배신!), 극의 대단원에서 ‘가짜대학생’과 미래를 다짐하면서, 마술적인 희망의 동력을 끌어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1994년 당시의 조선족 처녀의 ‘순진한 눈’이 과연 10여년도 더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순진한 희망’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나는 불편했다. 이 순진한 희망을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코리안 드림, 번역하면 ‘한국의 꿈’이다. 나는 조선족 처녀의 이 아름다운 꿈을 존중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꿈이 배반당함으로써 얻게 되는 뼈아픈 인식, 요컨대 서늘하면서도 뼈아픈 현실인식으로 그것이 연결되기를 바랐다. 순진한 희망보다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아픈 절망을 통해 획득하게 될 이 사회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균형잡인 현실감각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나는 그 희망이 불편했다.

그리고 다음날, 말 많은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먼저 대통령으로 분한 인물이 인자한 표정의 ‘송재호씨’라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일반화된 통념에서 보자면, 그 송재호씨는 얼마나 선량하고 인자할 뿐만 아니라, 옆집 아저씨 같았는지. 이 영화의 정치성과 특정인의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면서, 법률적 단죄와 검열을 이끌어낸 사람들과 그들의 지지계층의 협소한 ‘도량’에 대해 내가 안타까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배우 송재호라는 캐릭터를 고려해 보건대, 이 영화의 감독은 지나간 시대에 대해 필요한 예의와 균형잡힌 인내를 최대한 견지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면적인 ‘정치적 음모이론’은 오히려 씁쓸한 관객모독 아닌가.

두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재미없는 표현을 쓰자면 영화의 ‘수용맥락’이 현저한 세대적 간극을 초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유신 전후의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세대들은 어떤 차원에서 대단한 집중력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뿐 아니라, 이 영화가 끝난 후 카페와 술집과 거리에서 열띤 토론을 진행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대체로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의 태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그때 그 사람들’을 마치 영화 안에서 ‘토마토 케첩’으로 피의 효과를 강물처럼 뿌렸던 영화 ‘저수지의 개들’과 같은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요컨대 ‘시대적 맥락’을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관심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세대들은 웃다가 침묵하다가, 머리를 긁적긁적 하다가 게임방으로 직행한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윗세대의 ‘시대적 맥락’뿐만 아니라 보다 젊은 세대의 ‘영화적 맥락’이다. 진보건 보수건 ‘표현’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주장들이 전개되는데, 내 판단에 그것은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오히려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에서 핵심의제가 되어야 할 것은 ‘맥락’에 대한 토론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된 역사적 맥락에 대한 균형잡힌 토론, 그것에 대한 추론 자체를 불가능케 만든 원인으로서, ‘영화적 맥락’을 인위적으로 절제한 법률적 판단에 대한 토론, 그리고 그것을 추동해낸 현 사회적 맥락의 함의를 포함하여, 한국사회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토론이 진행되길 나는 희망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때 그 사람들’의 논의 수준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오늘 이 사람들’의 그것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에도 유사할 수 있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기묘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보면서 ‘오늘 이 사람들’은 한국의 총체적 현실이 특정한 지점에서는 시실리(時失里), 즉 ‘시간이 멈춰 있는 마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명절에는 산을 오른다. 돌아올 명절에는 ‘뿌연 안개’가 사라진 도시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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