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산천
강 기 갑 국회의원
시민일보
| 2005-06-09 20:48:59
{ILINK:1} 지금 내 고향 산천은 모심기가 한창이다. 전에 같으면 일모작 모심기 후 보리타작 한창일 때이나 보리나 밀을 심는 사람이 없어 거의가 일모작이다. 쌩가리(물잡는) 해 놓은 논에 이앙기로 모심기가 마무리 되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트랙터와 이양기로 남의 논 갈아주고 모심어 주던 일에 여념이 없던 때이다. 부락의 논과 모를 절반은 갈아주고 심어주던 그때의 혈기와 열정이 문득 그리워진다.
올해의 모심기가 막바지에 이르지만 농민들은 그저 모심는 철이 다가왔으니 모는 심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이 모가 자라서 벼로 성장하고 수확되면 나락이 되고 나락을 찧으면 쌀이 된다. 올해 벼 수매는 없어진 줄을 모르는 듯 모를 심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30~40년 전만 해도 식량자급 80%를 달성할 때도 모심기 할 때 농부들의 마음은 희망과 기대에 흥겨운 마음이 넘쳐났다. 가을의 수확을 상상하며 흥겨움이 묻어나는 몸짓들이 있고, 한 포기 한포기에 “고이고이 자라다오.”라는 정성과 염원이 꼬박꼬박 모포기마다 함께 심어졌다.
날이 가물어 논에 물이 말라갈 땐 농민의 마음이 함께 메말라 갔고 논바닥이 가뭄으로 쩍쩍 갈라질 땐 농민들 가슴이 찢어져갔다. 홍수나 폭우로 들판이 물바다 될 때는 태산 같은 걱정과 탄식이 농민들의 눈앞과 마음을 덮쳤고, 8~9월 태풍이 불어와 비질하듯 나락을 눕힐 때면 농민들은 그저 넋 나간 듯 “이 일을 우짜노”하며 원망도 포기도 할 수 없는 신세 한탄으로 그저 밥맛을 잃었다.
추석이 와도 쓰러진 벼를 두고 마음 편히 명절을 보낼 수 없어 다음날부터 한 포기 한 포기 일으켜 세워 묶으며 부러질 것 같은 허리의 아픔도 잊은 채 흘러내리는 머릿결을 흙손으로 쓸어 올리며 쨍한 햇빛을 올려 보기가 꺼려진다. 혹시 멍하니 정신이라도 잃을 것 같아…
이것이 우리 조상 우리 농민들의 벼농사와 함께 해온 애환의 역사이다. 햅쌀 장만하면 채 익지 않아 찐쌀로 빻아 햅쌀밥 먹을 때란 그 숱한 벼농사 과정의 고생들은 까마득 멀어져버리고 빨리 타작하여 쌀 찧어 빈 채독 채워 허어연 흰 쌀밥 가족들 실컷 먹여보자는 생각과 돈 장만하여 둘째 놈 다 떨어져 칭얼대는 신발도 사주고 고령의 부모님 밥상에 생선 몇 마리 사와 올리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 장만하고 남는 돈 중 쬐끔 떼어 거나하게 막걸리 두어 사발 걸치고 흥얼흥얼 십리길 걸어 보금자리 이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에 살던 우리 농민들. 그들에게 벼농사는 쌀농사의 역사는 생명과도 같은 역사이다.
이러한 쌀농사가 이젠 자본의 논리에 의하여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었구나. 모를 심어 놓고 논을 둘러보는 농민의 눈에, 마음에, 기쁨과 기대, 희망과 흥겨움보다 걱정과 금심, 우려와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으니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합창으로보다 그야말로 울음으로 들리는구나.
실제 이번 청문회는 협상과정과 결과에 대한 잘못과 실책들을 밝혀내는데 목적이 있기도 하지만 그 동안 통상에서의 일방적인 농업희생을 전제 혹은 기반으로 하는 인식과 관행들을 바로 잡아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에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비밀문서라도 제출해 놓은 자료들을 보면 중요한 것은 대부분 축약본으로 되어 있고, 정작 결정적인 문건들은 빼돌려 놓은 부분들이 더러 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공개되어야 하고 철저한 공개 속에서 많은 사람, 특히 입법부의 지적과 평가를 거쳐야 하고, 국민들의 평가와 심판도 받아야 한다. 그러한 과정들은 어느 특정인, 어느 부처를 공격하고 상처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식견을 통하여 점검과 평가를 받음으로써 보다 발전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진 잘못된 내용 때문에 끝까지 손을 움켜지고 있다면 그것은 원숭이가 독에 든 한 줌의 쌀을 움켜쥐고 놓지 않음으로 자신이 포로가 되는 어리석은 일과 같은 것이다.
공명정대하고 당당한 통상자세와 내용을 위하여 편법적이고 굴욕적인 지금까지의 통상자세와 내용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쌀 재협상 국정조사 현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잘못했건 잘했건 사실에 대한 시인과 인정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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