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섭과 나의 고백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시민일보
| 2005-11-15 20:37:08
{ILINK:1} 여의도가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거리마다 은행나무 잎이 뒹굴고, 아직 매달린 은행나무 잎은 하늘까지 노랗게 물들일 듯 그 기세가 장관이다. 의사당 안은 더욱 노란 은행나무로 여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내가 의사당을 출입한지도 10년이 다 되어간다.
계절마다 바뀌는 의사당의 모습은 이제는 눈을 감아도 훤하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불신을 당하고 외면을 받을수록 자연의 변화가 더 실감난다.
내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이 되어서 처음으로 한강을 넘어 의사당으로 갔을 때 여의도는 희망의 땅이었다.
적어도 한국의 미래는 여의도에 달려 있는 듯 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여의도에 거는 기대는 변함이 없다. 10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많은 정치인들이 자리를 바꾸었다. 그러나 정치는 한치도 나아진 것이 없이 여전히 국민들 속에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어있다.
그러나 여의도는 꼭 그렇게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희망도 있고 분노도 있고 꿈도 있고 미래도 있고 그리고 따뜻한 사람도 있다.
내가 강재섭을 알게 된 것도 벌써 10년의 세월이 되었다.
내가 초선으로 국회에 들어 갔을 때 그는 초선들이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3선이었다. 재선도 꿈같은데 3선이라니 나는 우선 깜빡 죽고 말았다. 그는 단순히 선수만 3선이 아니라 선수만큼 무거움도 있었다. 그와 나는 걸어 온 길이 워낙 극과 극이라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한국정치의 굴곡을 보았다.
그는 젊어서 검사로서 검찰, 청와대 등 권력기관에 근무해서 그런지 말수가 적었다. 가끔 의원회관이나 본회의장에서 만나도 그저 먼발치로 고개만 끄덕거리고 말았다. 그가 살아온 연륜이나 내가 살아온 연륜의 깊이가 두 사람을 쉽게 맺기에는 너무 다른 세계를 살았기 때문일까 나는 젊어서 내내 권력기관에 의해 탄압받는 생활, 구속, 감금, 연행, 미행, 수배, 고문 그리고 투옥 등 10년의 감옥과 7년의 수배 및 감시, 17년의 세월동안 가정을 등지고 거리에서, 산속에서, 감방에서 보냈기 때문에 뭔가 양지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체질적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강재섭을 볼때 마다 호칭이 애매했다.
나이는 나보다 좀 아래인 것 같고 선수는 나보다 두 번이나 높고, 그래서 어쩌다 부를 일이 있으면 그냥 강선배님이라고 깍듯이 불렀다. 초선과 삼선이니까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그렇게 1년 , 2년이 흘렀다.
나는 초선 2년차에 겁도 없이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에 출마했다.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가소롭게 보았을까!
5표 나오면 성공이라고 했다. 내 이름이 재오이니까 5표는 고정표란 농담이었다. 선거결과는 예상을 엎었다.
1등 박희태, 2등 이재오, 3등 정창화, 4등 김중위였고 무려 나는 32표를 받았다. 나는 비로소 국회의원으로 안정감을 찾았고, 주변에 대한 경계도 풀었고, 동료의원들도 나를 애정 어린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는 재야출신이라는 주눅 들림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다.
강재섭은 4선이 되었다. 진달래가 화장을 한 듯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4월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의원회관에서 좀 늦게 퇴청하는데 뒤에서 “형님 이제 가십니까” 하는 좀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강재섭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4선이 재선보고 형님이라니 내가 선배님, 선배님 하는데 또다시 “형님 같이 갑시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나밖에 없었다.
나는 “선배님 나보고 하는 소리입니까”하니 “선배님은 무슨 선배님, 재선이나 사선이나 초선 딱지 떨어졌으면 그게 그거 아닙니까” 하면서 내손을 잡았다.
나이가 나보다 적어도 선수가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이 이 의원”하고 반말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데 그때는 내가 하도 당황해서 그냥 얼버무렸다.
“강재섭이 뭔가 잘못 생각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종종 부딪힐 때 마다 강재섭은 꼭 나에게 형님이라 불렀고 그것도 선후배 의원들 앞에서 따뜻한 목소리로 정감 있게 착 감기게 부르는 소리였으니 그와 내가 아무리 다른 길을 걸었다 해도 인간으로서 정이 베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후 나는 제1부총장, 원내총무를 거쳐 당대표 경선에 나섰다.
당대표 경선과정에서 전국을 함께 돌면서 유세도 같이 하고 방송토론도 같이 하면서 비로소 나는 강재섭의 내면 세계와 그의 인간됨, 그의 정치철학 그리고 그의 꿈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관직에 들어서서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에서 어깨너머로 정치를 보았고 정치적 실세들의 틈에서 세상을 보았다. 나는 어쩌면 그들의 전성시대에 그들의 통치에 걸림돌이 되어 감옥과 수배의 연속적인 삶을 통해 정치를 보았고 가슴속 깊은 곳에 내가 정치를 한다면 하고 한세월을 보냈다. 강재섭과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니 서로가 가깝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세상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그것을 의식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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