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미국인, 베이커 선생”

열린우리당 이부영 전 의장

시민일보

| 2005-12-19 20:22:42

{ILINK:1} 에드워드 베이커, 나의 오랜 미국인 친구다.
그를 만나기 위해 12월7일 아침 7시30분 남산 중턱의 힐튼 호텔로 달려갔다. 조찬약속이었다. 시간약속을 칼끝같이 지키는 분인데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다.

확인해보니 남산쪽 힐튼 호텔이 아니고 홍은동쪽 그랜드 힐튼 호텔이었다. 헐레벌떡 차를 몰고 달려갔다.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베이커 선생이 로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했다. 인상좋은 베이커는 연신 괜찮다고 한다. 그러니 더 미안했다.

베이커 선생이 서울에 오거나 내가 보스턴에 가거나 횟수를 기억할 수 없이 여러 차례 만났지만 3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표정도 그렇고 말품새도 그렇고, 사람좋은 그 인품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은 향기가 난다.

요즘 사람들은 베이커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혹자는 전 미국 국무부장관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니다.
베이커는 1974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미국의 평화봉사단원이었고 이후 미 하버드대의 옌칭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면서 한국학 연구지원과 민주화운동 해외연결 지원에 힘써 준 사람이다.

지난 여름부터 베이커 선생과 나는 몇 차례 만날 때마다 혹은 이메일을 통해서 한 가지 주제를 놓고 논의를 해왔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필요 이상으로 오해와 반감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과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노력이 기우려져야한다는 것이 논의의 요지였다. 마침 김지하 시인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참이어서 지난 가을에는 세 사람이 함께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미국과의 이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이른바 민주화운동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로 탐탁한 주제가 아니어서 꺼내지 않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제 그럴 계제가 아니라는 것이 김 시인과 나의 인식이어서 그래도 우리의 처지를 비교적 깊은 애착을 가지고 지켜보는 베이커 선생과 상의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우선 한국에서 지난 40여년동안 민주화운동을 해왔고 미국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그리고 시인 사상가로 알려진 김지하 시인이 미국의 지식인들과 대화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데 의견을 함께했다.

지난 오랜 세월의 반독재 민주화운동 시기에 운동의 현장에서 힘겨운 투쟁을 감당한 투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말 그대로 명예도 이름도 없이 우리의 운동을 지원하고 알리느라고 애써준 국내외의 많은 후원자들이 있었다.
종교인, 언론인, 지식인, 정치인 등등 수많은 정말 고마운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 분들 가운데 미국인으로서는 우뚝한 분이 베이커 선생이다.
베이커 선생을 얘기하다보면 꼭 생각나는 이가 세상 떠난 최성일 박사다. 유신시대와 80년 광주학살 이후 베이커선생과 최 박사는 미국에서 치열한 민주화운동을 함께 전개했다.

유신선포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대학교수 잘 하고 있던 최 박사가 교수직 던지고 나섰다. 베이커 선생이 비교적 자주 한국을 내왕해서 국내의 여러 자료를 가져가고 그것들을 최 박사 그룹이 알리고 지원 그룹을 조직하는 식이었다. 1990년 내가 마지막으로 감옥살이할 때 영등포교도소로 면회왔던 최 박사가 불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통했다가 2년뒤 그의 묘소를 베이커 선생과 최 박사 모친이신 김신재 여사와 함께 찾았었다.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직후까지 한국 영화의 톱스타였던 김 여사께서도 귀한 아들을 여의신 뒤 쓸쓸히 만년을 보내시다가 아들 곁으로 돌아가셨다. 베이커 선생과 함께 그 뒤 두 분의 묘소를 찾아뵈었다.

1995년 하버드대학에서 베이커선생의 주선으로 강연 겸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베이커 선생은 우리말에 능통해서 한국인들과는 누구와 만나도 불편이 없다.
부인께서도 오래되기는 했어도 우리말을 잘 알아듣는다. 내 아내와 나는 베이커 선생의 초대로 그 댁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보스턴 교외의 검소하고 작은 집은 그렇다치고 우리 부부가 놀란 것은 부인이 몰고 다니는 지프차였다. 낡은 그 지프차 앞 범퍼에 붙어있던 튼튼한 철제 스티카가 눈에 유난히 들어왔다. 흰색 페인트 바탕 위에 검은 글씨로 ‘Kwangju Massacre’(광주학살)이라고 써놓고 그 글씨 위로 핏빛 붉은 페인트를 튀겨놓았던 것이다.
광주 학살이 자행된 지 15년이 지났어도 미국 보스턴에서 묵묵히 그 만행을 규탄하고 있던 선생과 그 부인 앞에서 나는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나와 나이가 같고, 미국인이지만 난 그를 ‘선생’이라고 부르며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미국인을 만나게 된다. 한 세기가 훨씬 넘게 계속되는 한미 관계는 수많은 명암과 파동을 안고 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베이커 선생과 같은 소중한 인연들도 만들어왔다. 이런 소중한 인연들이 더욱 견고해지고 확대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요즘 더욱 절실해진다.

김대중도서관의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급히 귀국해야한다고 떠나는 베이커 선생을 배웅하면서 동갑내기이면서도 나보다는 훨씬 노인네같은 베이커 선생 등 뒤에 대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미국 사람 가운데도 저런 분이 많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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