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삼보일배’

이영순(민주노동당 의원)

시민일보

| 2006-02-09 20:08:40

{ILINK:1} 7일. 정말 오랜만에 서울지역에 눈이 내렸다.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생활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에 눈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눈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보좌관들은 카메라를 들고 나가자고 조른다. 체면과 품위를 우선할까 마음 한구석에 있는 동심을 우선할까 망설이다가 업무에 바빠 그만 책상에 앉고 말았다. 강남대로에서 순천 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는 보고다. 명치끝이 아리하게 아파온다.

하필이면 눈오는 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공연히 들뜨는 날, 질퍽거리는 도로에서 젖은 옷은 어떻게 하자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너무나 처절하고 안타깝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내몬 현대측의 비정함에 분함을 넘어 저주의 감정이 치솟는다.
기업도 사람이 하는 일일진데 어찌 이리 모질고 독한 짓을 할까… 사태를 이렇게 몰고 가는 인간들도 집에 가서는 자상한 남편, 인자한 아버지인척 하겠지… 좋은 회사의 간부라고, 경영자라고 어디 가서 거들먹거리고 비싼 요리 집에서 식도락을 따지며 그 입에 고기를 집어넣고 있겠지… 더러운 인간들!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말 억울한 사람들이다. 작년 11월 그들이 공장크레인에서 극단적인 농성을 할때 우리당 단병호 의원, 심상정 의원과 함께 투쟁현장을 방문하였다. 사태는 정말 엄중하였다.

그들은 거기에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다. 그 몇 달 전 현대측은 사내하청노동자가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하도급 계약을 폐지하여 자동으로 노조원들을 일터에서 내쫓아버렸다. 비정규직이라고 한 달에 120~130만원 받던 사람들이다. 그것마저도 빼앗긴 것이다. 헌법상의 권리를 누리려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들은 그 몇 달간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시장 시의원 면담, 탄원, 1인 시위, 평화적 합법적 집회 등등. 연예인들 문제는 시시콜콜한 신변잡사까지도 보도하는 메이저 언론들은 이들의 외침을 철저히 외면했고, 국민의 대변자이고 애국자인양 잘난 척을 하던 정치권의 어느 누구도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였더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한 달에 5만원하는 자식놈의 학원등록을 포기하고 아이들 좋아하는 튀김 닭 하나 간식으로 사줄 수 없는 그런 가장이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끝장을 보러 크레인에 올라가서 울부짖었을 거란 말이다. 대형 인명사고가 우려되었든, 공장이 불타버릴 것이 두려웠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언론은 호들갑을 떨고, 청와대도 나서고… 결국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노사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협약을 맺고 농성을 풀었다. 다량의 구속사태도 노조는 감수하였다. 옥살이하고 나와서 생계수단인 그 알량한 직장에라도 복귀할 수 있다면 형사처벌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 노조의 입장이었다.

그 사회적 협약과정을 우연찮게 들여다보게 된 나로서는 노조의 너무나 소박하고 상식적인 요구와 최악을 피하고자하는 그들의 노력이 참으로 눈물겹게 느껴졌다. 새로운 해결모델이니 뭐니 하며 그 투쟁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사회와 언론, 정치권은 그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그 협약이 지켜지고 있는지 그 잘난 국민의 대변자, 만고의 애국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장이 불타버릴 위기를 넘긴 현대측은 합의 정신을 위배하여 72억이나 되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복직은 커녕 또 다시 대량 해고를 하면서 모든 걸 원점, 아니 오히려 후퇴시키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천하에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협약서는 그야말로 휴지조각에 불과하였다.
한국의 천민자본가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수준 이하의 인간들임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천명한 것이다.

노사정 협의회를 만들자는 것이 정부의 노동계에 대한 요구인데 만들어야 아무소용 없다는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다시 항의와 절규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번영과 부를 상징하는 테헤란로… 그 화려한 부의 거리를 네발로 기며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인내는 보통사람의 몇 백배는 되는 듯하다. 이 와중에도 평화적 방법을 택하니 말이다. 메이저 언론들은 이 참담한 사태에 대해 또다시 외면하였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어 사장면담을 요구하며 몸싸움을 하여 회사마당에라도 진입하면 이들은 폭도로 몰릴 것이다. 이들을 잡아가는 경찰에 대항이라도 하면 폭력시위자로 내몰리고 전·의경을 두들겨 패는 폭도들로 낙인찍힐 것이다. 부자들과 생활이 안정된 사람은 모른다. 하루하루 삶이 척박한 사람들의 절박함을 모른다. 있는 자들이 더 좋은 옷을 찾아다니고, 더 좋은 차에 더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에 지쳐 웰빙을 부르짖고, 백세장수를 추구할 때 자식들의 맑은 눈동자에 그늘을 지우지 않으려고, 분유 값을 벌어보려고, 추위를 가릴 옷만이라도 장만해보려고 전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 나쁜 사람들아. 흰눈이 내리는 오늘같이 아름다운 날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도 안타깝고 비감한 마음에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분노와 원망을 늘어놓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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