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서

정인봉 변호사

시민일보

| 2006-06-01 21:02:32

{ILINK:1}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이길수록 겸손해야 하는 것이 한나라당의 입장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모처럼 허허로운 마음으로 긴장을 푼 상태에서 골목길 이야기나 할까 합니다.

이 글의 제목이 골목길임은 실제로 이 곳에서 제 꿈이 자라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넉넉하게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대문 안 종로구 명륜동에서 자라났으니 복받은 시절이라고나 할까요

돌이켜 보면 그 때는 동네에 가게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가게 세가 비싸서 그랬는지 건물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요즈음은 사람 걱정하지만 그 때는 사람은 넉넉해서 그랬는지 골목에는 동시에 아니면 줄을 이어서 골목에 돌아다니던 장수들이 꽤 많았습니다.

등짐장수나 자전거장수 그리고 머리에 무언가 잔뜩 이고 다니던 아줌마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아저씨들이 있었고 똥치는 아저씨들도 있었습니다. 긴 장대 앞뒤쪽으로 똥통을 하나씩 매달고 그 장대의 가운데 쯤을 어깨에 메고 뛰듯이 걷고 걷듯이 뛰는 아저씨들도 계셨습니다.

한가지는 엿치기를 하던 가락엿, 또한가지는 네모진 엿모판에 담긴 엿을 망치와 정으로 갈라주던 모판 엿, 그리고 생강엿. 대패로 얇게 벗겨낸 대패밥 같이 생긴 엿을 성냥개비 같은 것으로 가볍게 뭉쳐주던 엿이 있었습니다.

엿치기 하던 아저씨들이 생각납니다. 형아들이나 아저씨들이 별 내기가 없으니 하는 것이었겠지만 밀가루에 묻힌 허연 엿을 골라서 중간 허리를 뚝 끊어 버리고 난 다음에 그 허리에 난 구멍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서 내기를 하던 것이었죠. 그저 엿 먹기 내기를 하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돈 내기를 하는 것이었는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잘 쫓아 다니면 엿은 그냥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허연 엿 옆에는 항상 깨엿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가짜가 많았는지 엄마나 형아들이 거 깨엿에 묻어 있는 것이 전부 깨가 아니라 깨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니....

조금 철이 난 다음에 수수께끼 중의 하나가 엿장수가 1분에 가위를 몇 번씩 쩍쩍대는 걸까? 하고 질문하면 엿장수 맘대로 라고 대답하고 낄길 웃던 그 단순한 수수께끼.

엿장수를 생각하면 왜 허연 고무신 검정고무신과 고물 넝마 이런 것들이 생각나는 것일까요? 그리고 식모도 생각이 납니다. 용돈이 없었던 아이들은 집에 있다가 엿장수 가위 소리가 들리면 집에 웬만큼 바꿔 먹을 만한 게 있으면 그저 엿장수에게 달려 가곤 했습니다.

식모 언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에 있으면서 밥만 먹었지 간식을 전혀 먹지 못했던 식모 언니들은 엄마가 없을 때면 집안에 있는 헌책이나 쇠붙이를 들고 가서 엿 바꿔 먹고 강냉이도 바꾸어 먹곤 했었습니다.

엿장수 아저씨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금속성의 소리였다면 당고 장수 아저씨들은 대나무로 만든 악기 소리에 가까웠습니다. 그 따따 따따 따닥 하던 소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라틴음악을 연주할 때 쓰이는 악기의 하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젓가락 크기의 나무 막대기에 직경 8 내지 10센cm, 길이 15cm의 대나무 통을 매달고 나무 막대기를 빙빙 돌리면 “따따 따따 딱”이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들은 그걸 듣고 돈이 없어서 사먹지는 못해도 경단장수인지 당고 장수 아저씨를 보러 나갔습니다.

당고 장수는 앞뒤쪽에 유리창 달린 나무 상자를 매단 긴 장대를 어깨에 메고 다녔어. 그 무게도 상당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유리창 달린 나무상자의 안쪽에는 숯이 들어 있어서 항상 식지 않고 데워가면서 다녔던 것 같아. 그래서 그 나무통위 위쪽에서는 연기가 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당고장수가 팔고 다닌 것은 항상 가는 대까치 같은 것에 떡이 다섯개 정도 꼬치식으로 꿰어져 있었고 그 떡에는 누런 색의 콩고물이 묻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떡은 네모다랗게 생겼었고 아주 조그만 떡이었습니다.

그것도 맛있었지만 역시 당고. 눈깔 사탕 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동그랗게 묻혀진 단팥당고가 맛은 더 있었습니다.

비쌌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경단이나 당고는 많이 먹어 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아마 일본식의 음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후에 차츰 없어진 것 같으니.

그러고 보면 그 때는 좁은 골목이 매우 분주했었던 것 같아. 여러 장수들이 어떤 때는 광주리를 이고 등짐을 지고 자전거를 타고 리어카를 끌고 양쪽에 무거운 것을 담고 장대에 의지해서 메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채권장사 아저씨, 이발하러 돌아다니던 아저씨, 연탄 찍으러 다니던 아저씨, 양은냄비 떼우러 다니던 아저씨들도 만만치 않게 돌아다녔고 아이들끼리 술재잡기, 말타기, 땅따먹기, 사방놀이, 고무줄 놀이, 오재미, 그리고 연날리기, 등을 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 때 골목은 살아서 숨쉬는 곳이었던 것이죠.

지금 골목은 그저 목적지를 가기 위하여 서둘러 가야만 할 공간 지나쳐야만 할 공간일 뿐. 그저 좁게만 느껴지는 경유지에 불과할 뿐…

그래도 우리들이 그 좁은 골목에서 편히 놀면서 자랄 수 있었던 건 자동차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뭔가 부족한 것이 더 편하고 사랑스러운 적도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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