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시절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시민일보
| 2006-10-25 17:58:22
“맹형규 국회의원께
딱 한 가지!! 전쟁 일어나지 않게 해주시고 얼른 북한과 전쟁이 아닌 평화통일을 하루빨리 이루어지도록 힘써 주기길 바랍니다.”
17대 국회가 개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초등학생으로부터 엽서 한 장을 받았다. 학교에서 이런 엽서를 써 보내는 수업이 있었는지, 아니면 정말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 때문에 스스로 이런 엽서를 적어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발발의 위험성을 얘기하면 마치 시대를 거꾸로 사는 듯한 사람 취급을 하는가 하면, 통일을 말하는 사람은 몽상가 취급 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은 세상이어서 더욱 그렇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전쟁을 겪었다. 다섯 살 나던 해였다. 대포 소리도 따발총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비장한 표정을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어른들을 보며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지, 그것이 전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린 내게도 보따리가 하나 안겨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는지 보이질 않고, 나는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와 나보다 더 어린 동생들도 함께였다. 나들이쯤으로 생각하고는 물었다.
“엄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가는 거야. 할머니 손 꼭 붙들고 놓치지 마라. 네 보따리도 잊지 말고 꼭 챙기고”
난리며 피난이란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만으로도 순간적으로 공포감이 몰려왔다.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져서 잘 걷던 걸음걸이도 자꾸만 비척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꾸역꾸역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어린애든 어른이든 손에 등에 보따리며 등짐을 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행여 할머니를 놓칠세라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꼭 붙들었다. 그리고 가끔씩 뒤를 힐끗거리며 어머니와 동생들이 제대로 쫓아오는지 확인했다.
나는 지금도 영화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화면이 빠르게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면 꼭 그때 그 피난길이 떠오른다. 종종걸음으로 이리 헤집고 저리 헤집으며 잠시도 쉴 짬조차 없이 바삐 걷던 그날의 풍경과 너무나 닮았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힘든 줄도 모르고 지루한 줄도 모르고 그저 조급한 마음 하나만으로 동당거리며 하염없이 걸었다.
부둣가에 닿았고 거기서 배를 탔다. 요즘처럼 규모도 크고 편의시설도 갖춰진 배가 아니라 돛단배였다.
그 배로 마산까지 가야 했으니 우리가 겪었을 고생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다. 힘들고 배고프다며 시시때때로 울던 동생, 바다를 뚫고 쏟아지는 총탄,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손바닥만한 배를 덮치던 거대한 파도….
처음에는 이 모든 낯설고 살벌한 모습에 잔뜩 움츠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총탄이 쉼 없이 쏟아지는 것도 파도가 연신 들이닥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차린 것이다.
오히려 사격 소리나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사방이 너무도 고요해서 왠지 심심하고 허전하기까지 했다.
나른하면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기도 했고,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서 동생들과 율동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비행기에서 퍼붓는 총탄 세례로 지금 당장 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집채만한 파도가 그깟 돛단배를 삼키려 든다면 그것 역시 순간이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긴박함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라니, 참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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