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맹켄바우어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시민일보
| 2006-11-08 16:46:57
내 앨범 속의 빛바랜 사진 중에는 1978년쯤 되던 해 기자협회 주최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볼 다루는 솜씨가 아니라 순전히 포지션이 같다고 해서 독일의 유명한 축구선수요 감독인 베켄바우어의 이름을 따서 동료들이 ‘맹켄바우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던 바로 그 대회다. 사진 속에는 문화관광부 장관 정동채씨도 보이고 주일공사를 지낸 김기성씨의 모습도 있다. 최근까지 춘천컨트리클럽 사장이었던 경창호씨, 소비자보호원장을 지내 박동진씨, 아직도 연합통신에 남아 논설위원을 하는 박영규씨, 지금은 작고한 조재필씨. 모두가 반갑고 그리운 얼굴이다.
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축구대회는 동업자들끼리의 축구 시합이라서 취재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필드에서야 특종과 낙종이 얼마나 빨리 정보를 얻어 기사를 싣느냐로 판가름나겠지만 운동장에서의 논리는 아주 단순했다. 이기면 특종이요 지면 낙종이었다. 상대팀을 하나 둘씩 꺾고 마침내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더욱이 경쟁사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닌가.
어렸을 적부터 나는 운동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바둑이 지금도 제자리걸음 수준인 14급이니 말해 뭣할까마는 앉아서 하는 것은 공부나 그림 그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운동장을 누비며 운동을 하지 못하면 하다못해 뒷산인 인왕산이나 북악산을 헤집고 돌아다니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다.
앞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집안에서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했다. 집안에서 어른들과 부딪히는 일의 대부분은 운동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몸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흠뻑 땀 쏟은 뒤의 기분을 아는 나를 가둬 둘 수는 없었다.
바깥출입을 못하게 하면 담을 뛰어넘어서라도 나가야 했다. 기계체조를 배워 둔 덕분이었다. 정식으로 선수 생활을 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를 붙인 핸드볼이었지만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고 포기했다.
권투나 유도를 하게 된 계기는 좀 엉뚱하다.
우리 어릴 때에는 선거철에 유세를 보러 다니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기발한 구호들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안겨 주려는 후보도 있었고, 갖은 치장을 한 조랑말을 끌고 다니며 눈길을 끌려는 후보도 있었다. 거의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여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유세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 역시 줄곧 유세장을 따라다녔는데, 정치인이 되려는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순전히 김두한씨의 무협지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권투도장에 등록하기도 하고 당시 시청 앞에 있던 중앙도장에서 유도를 배우기도 했다.
운동을 하러 다닌다는 소리가 어른들의 귀에 들어가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해서 친구 집에 도복을 맡기고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운동을 하러 갔다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 덕분인지 나는 아직껏 누구에게도 맞고 다니지는 않은 것 같다. 어찌 보면 순전히 김두한씨 덕분이다.
지난해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이 갑자기 족구를 하자고 들었다. 맹켄바우어라고 불리던 내 실력을 보여 줄 수 있겠구나 싶어서 냉큼 승낙을 해버렸다. 당연히 주전 공격수 자리를 맡았다. 시작하기 전에 우리 편 선수들을 모아서 내가 맹켄바우어로 활약하던 때의 얘기도 자랑스럽게 늘어놓아 가며 작전도 짜고 코치 노릇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작 시합에 들어가서는 연속 헛발질을 해대서 맹켄바우어는커녕 맹구 노릇만 톡톡히 했다. 그날 이후에도 조기 축구회 모임에 나갈 때면 젊은 시절 맹켄바우어의 명성을 보여 주고 싶은 의욕이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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