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배향격론(背向激論)
이노근(노원구청장)
시민일보
| 2006-11-14 17:46:01
한양천도론의 또 다른 격론(激論)은 ‘과연 궁궐을 어느 쪽으로 배향(背向)하느냐’이다. 그 영감은 광화문 밖 노상을 어슬렁거리면서 긴 지팡이로 연신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을 가리켰다.
천학(淺學)은 풍수이론에 거의 까막눈이지만 그 강론에 그래도 몸 시늉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장풍득수(藏風得水)’ ‘배산임수(背山臨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등등
하여간 이 우학(愚學)은 그렇게 풍수형국론(風水形局論)으로 대꾸를 하자 그 노학(老學)은 신명이 났는지 더욱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 영감의 ‘경복궁 명당야화(明堂夜話)’에 대한 풍수 강론은 나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몇 번 뜸을 들이고서야 털어놨다.
그 영감의 명당론 강의를 일일이 정론(正論)으로 확인하고 접수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내용이 아주 진지하여 조금이라도 전파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다.
소위 경복궁 배향격론(背向激論)이 그것이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한바탕 벌어진 ‘배산주산(背山主山)’논쟁은 지금까지 세인(世人)의 화제(話題)가 되고 있다.
그러하면 먼저 무학대사(1327~ 1405년)의 논지(論旨)는 무엇이더냐? 소위 ‘왕궁동향론(王宮東向論)’이 그것이다.
‘새 왕조 궁궐은 동향(東向)으로 배열해야한다…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낙산(駱山)을 안산(案山)으로 맞
아들이며… 남산과 북악산을 각각 청룡과 백호로 거느려야한다…’
‘그리하면 조선을 에워싼 군소제국(群小諸國)들이 조공(朝貢)을 바칠 거고… 천년 세월을 넘게 태평성대가 이어질 거다…’
그렇다면 삼봉(三峯) 정도전(1337~1398년)의 왕궁 남향론(南向論)은 무엇이더냐?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를 근거로 궁궐은 반드시 남향으로 배열해야한다… 당나라 장안성도 그러하고 고려의 개경 궁궐이 그러하다…’ ‘만일 동향(東向)으로 배향하면 왕의 권위가 실추되고 궁궐법도가 무너진다… 궁궐은 남향으로 배향해야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도 조화가 된다…’
‘궁궐에서 남향 정문을 흔히 오문(午門:세종 때 오문에서 광화문으로 바뀜)이라고 하는 것은 남향으로 배치하기 때문이다… 태양처럼 밝고 따뜻한 정치를 베풀려면 남향의 기운(氣運)을 받아야 한다…’
사실 후시대(後時代)에 건설된 명(明)나라 자금성과 청(淸)나라 심양 고궁들도 모두가 남향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두 실력자 간 배산주향(背山主向) 논쟁은 어떤 결론에 이르렀을까?
당시 두 사람 간의 양론은 국론(國論)을 크게 분열시키기도 했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의 손을 들어 ‘남향 배향설’을 택하였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일까?
그 첫째 이유는 북악산 산자락에 연흥전(延興殿:고려 숙종 6년 재위:1095년~1105년에 설치)이라는 고려 남경(南京)의 이궁이 백악산(白岳山:현재의 북악산)자락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둘째로는 그 부지(敷地)가 고루 평평하고 넓으며 가깝게는 청계천이 멀리는 한강이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셋째로 남산과 관악산 등이 있는데 그 산(山)들은 마치 신하들이 조공(朝貢)하는 모습과 같다는 점에서이다.
궁궐 동향론을 주장한 무학대사가 예언(豫言)하기를 “만약 궁궐을 남향으로 배향하면 언젠가는 재앙(災殃)이 닥칠 것이라”했는데 실제 그러했나?
“무학의 재앙론(災殃論)은 거짓말 같이 적중(的中)하였지요… 조선은 개창 후 얼마 안돼서 골육상쟁이 벌어졌으니까요… 왕자의 난(1398년)과 단종의 폐위(1455년)가 그러하고… 200년 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어요!”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神奇)하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