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를 복간하는 자세
전대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시민일보
| 2007-01-30 18:35:03
{ILINK:1} 2007년 들어 우리 사회와 민족의 발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해 줄 큰 행사가 열렸다. 1월25일 한국관광공사 지하 강당. 무대 위에는 사상계(思想界) 복간 발기인 대회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입구에서부터 실내외를 꽉 채운 손님들도 거개 낯이 익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은 손을 마주잡고 흔들어댄다.
군사독재 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끌려 다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이가 든 모습으로 한결 점잖아지고 성숙한 자세가 역연하다. 앞자리에는 장준하선생과 함께 일하던 분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 모두 잠자는 민족의 얼을 일깨워줬던 사상계가 복간된다는 데 대해서 약간은 흥분하고 약간은 걱정하는 듯 했다.
사실 사상계가 복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1953년 부산 피난지에서 다방을 전전하며 원고를 정리하고 리어커에 원고 뭉치를 싣고 다니며 인쇄소를 들락거렸다는 ‘전설’을 들어왔던 필자로서도 사상계 복간은 가슴에 서린 소원이었다.
자유당 시절 사상계는 4.19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당시의 대학생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다. 두툼한 사상계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은 뭔가 세상을 좀 아는 학생이라는 눈길을 받았다. 실제로 장준하의 권두언이나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등은 자신도 모르게 끌려들어가는 마력이 있었다.
머리를 쭈뼛 세우게 하고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사회의 실상을 깊이 알게 하고 이면에 파묻혀 있는 얘기를 끄집어낸 게 사상계다. 당대 제일의 필진으로 채워진 논설은 요즈음 유명 교수들의 행태처럼 남의 글을 베끼거나 제자의 아이디어를 표절하는 일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자기의 성심을 다하여 피를 토하는 감정으로 글을 썼기에 읽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상계의 주가가 높아진 가장 큰 원인은 필자들의 사명감에 넘친 글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확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 나라를 바로 가게 하는데 이바지 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글을 썼다. 그러기에 그 글은 살아서 꿈틀거렸고 머뭇거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잠재의식을 불러 깨우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긴 세월 잡지계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장준하는 이제 다방을 떠돌며 원고와 씨름하던 잡지장이가 아니었다. 종로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당당한 사장이 되었다. 언론인, 교수, 예술인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독립운동의 동지들과 정치인들도 함께 했다.
그들과의 모임은 항상 토론장이 되었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어떻게 해야 독재를 이겨내고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 심각하게 담론을 나눴다. 자유당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는 국토개발위원장을 맡았다. 장관급 공무원이 된 셈이다. 5.16쿠데타로 국토개발의 소중한 꿈은 이룩하지 못했지만 그가 설계한 뜻만은 군사정권 하에서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 과정을 거치며 장준하는 사상계의 발행인을 부완혁에게 맡기고 국회의원으로 당선한다. 생각하고 말하며 쓰기만을 고집했던 장준하가 이제는 야당 정치인이 되어 군사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무게가 실렸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다.
그는 광복군 출신답게 국회 국방위원이 되어 베트남에 주둔하는 한국군을 방문하는 등 야당의원이면서도 격려하기를 피하지 않는 금도를 보였다. 그의 역사관과 사생관은 누구보다 확고했다. ‘민족’이 하나 되고 바로 서야 한다는 원칙은 변할 수 없는 철칙이지만 목숨을 걸고라도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그가 정치인으로 편안한 삶을 추구했더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도 남았다. 그는 유신이 선포되자 양일동, 김홍일, 정화암 등 독립운동을 했던 선배들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여 반유신 투쟁의 선봉이 된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를 통한 달콤한 유혹을 뿌리친 그들은 모두 국회의원에서 퇴출된다.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지 시혜를 입어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님을 몸으로 보였다. 이제 사상계가 복간하기 위해서는 장준하의 그 자세를 그대로 견지해야만 한다. 복간 발기문을 보면 현란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일반 국민의 판정이라고 하면서 민주화 운동세력이 “경륜과 능력이 없다”고 갈파했다.
거시적으로 사물을 간파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하고 있는 ‘겉은 젊으면서 속은 낡아빠진’ 세대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사회의 큰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을 런지는 복간 주역들의 겸손과 신념에 달렸다. 일부가 아닌 전체를 겨냥한 새로운 ‘사상계’를 읽을 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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