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전략으로서의 북핵
한나라당 김정기 노원병위원장
시민일보
| 2007-01-31 18:16:15
북핵 역사는 오래 됐지요. 김일성은 러시아군 장교로 있을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강타했던 가공할 만한 핵 파괴력을 알게 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유사시에 핵사용을 언급하여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일과, 1953년 휴전체제를 맞기 직전 아이젠하워가 중국 측에 대해 정전체제로 가지 않으면 핵을 사용하겠다는 협박을 하자 김일성은 이때부터 핵을 북한 정권의 생존과 관련해 생각하게 되지요. 1955년 북한의 과학자들을 러시아에 급파해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다섯 번째 핵보유국이 된 중국이 1964년 핵실험을 하게 되자, 이에 자극받은 김일성은 러시아에서 도입한 IRT-2000을 통해서 1965년 핵을 개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핵분열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그 후 1975년 북한은 그람 단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습니다. 핵연료로 사용되는 우라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원소로, 이를 원자로에 넣고 연소시키면 핵분열이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원소가 바로 플루토늄입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을 완전 연소시키면 얻을 수 없고, 반쯤 태우다 꺼내야 하는데, 북핵 위기 과정에서 영변 원자로의 사용 후 연료봉(일명 폐연료봉) 및 그 재처리 과정이 쉼 없이 문제가 된 게 이런 탓이지요. 1975년은 미국이 베트남과의 전쟁을 종결하고 월남이 적화통일을 맞게 되는 시점이죠. 이때 자신을 얻은 김일성은 전쟁의지를 중국에 알렸고, 이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한국전쟁이 재현되면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전략적 핵무기를 한국 내 배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핵이 한반도의 전쟁을 억제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NPT 탈퇴 선언으로 협박했어요.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 선언으로 촉발된 1차 북핵 위기는 북한의 핵 연료봉 추출로 이어졌지요. 미국은 즉각 북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했고, IAEA는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에 북한이 IAEA 공식 탈퇴로 맞서자, 클린턴 미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검토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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