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는 ‘마지막 패배’를 앞두고 있나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시민일보
| 2008-06-10 18:45:51
나는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시 태어났으니 몇 년 후면 '환갑'이 된다. 교수 생활도 25년이 되어, 학내에선 '원로교수'가 됐다. 교수라는 직업이 좋은 것은 젊은이들과 생활하는 것이다. 새 학기가 되면 싱싱한 새 얼굴들을 보는 기분이 교직을 하게 하는 아드레나린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보수단체가 주최하는 세미나, 강연회, 포럼 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서글프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가장 나이가 젊은 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어르신은 ""이제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나서야 한다""고 하셨다. '50대 중반의 원로교수'인 내가 ‘젊은이’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단체의 세미나 강연회 등에 참석하는 분의 평균연령은 적어도 65세는 되기 때문이다. 보수단체가 주최하는 야외 집회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나이 든 분들의 국가관이 건전하고, 그분들이 살아 온 과정이 현시점에 주는 교훈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예비역 참전용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국민행동본부 같은 시민단체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막아내는 등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충정(衷情)이라도 후대(後代)가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어르신들은 이 점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어르신들은 또한 조선일보의 김대중 류근일 칼럼을 열심히 읽고, 조갑제 선생과 김성욱 기자의 책을 사서 탐독한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조갑제, 김성욱씨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글은 남의 생각을 움직이는데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의 미래를 지고 갈 젊은 세대에 영향을 주어야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이 점에서도 완전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으로 이명박씨가 30% 지지로 대통령직을 따내서 보수가 정권을 따냈을 뿐이다.
조갑제씨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을 ‘이명박 혁명’이라고 불렀다. 신동아와 월간조선은 금년 1월호를 이명박 찬양 기사로 가뜩 채워서 만들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는 바다 수면 위에 나온 빙산 같은 것이다. 수면 위에 보이는 빙산은 수면 아래 빙산에 비하면 그야말로 빙산일각(氷山一角)이다. 수면 아래의 사정은 수면 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수면 아래에서 보수는 계속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촛불 시위를 보면, 그야말로 '10대-20대의 바다'이다. 특히 여학생 파워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변에 진치고 있는 좌파 진영을 초라하게 보이게 할 정도다. 이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도무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움직인단 말인가? 이들이 과연 전교조와 좌파 미디어의 선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증오가 그토록 크단 말인가? 손에 손에 휴대폰과 디카를 든, 이 풍요한 세대를 누가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보수 일각에선 이번 사태를 ‘좌익의 엄청난 음모’로 보고 있다. 따라서 '배후'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확실한 '배후'가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런 것 같지가 않으니 문제다. 물론 민노총 등 진보진영이 이번 사태를 호재로 보고 대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시위의 주축을 이룬 10대와 20대의 대부분을 ‘좌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보수진영 일각에선 이번 사태를 철없는 젊은 세대의 경거망동(輕擧妄動)으로 보고 있다. 그것도 어리석은 판단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젊은이들의 분노가 '일시적 감정의 분출'이고 '유행'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감정'과 '유행'이 한 나라의 공권력을 무력화시킨다면, 이건 이미 ‘나라’가 아니다. 한국의 보수가 생각했던 ‘나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현상에 나는 곤혹스러울 뿐이다. 나는 평소부터 ‘문화전쟁’을 모르는 보수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젊은이들의 가슴과 머리에 건전한 보수의 철학과 생각을 넣지 않으면 진보 세력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도덕성을 저버린 보수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촛불시위는 ‘문화전쟁’의 연장이고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도덕성을 상실하고 ‘문화전쟁’을 모르는 한국의 보수는 이제 ‘마지막 패배’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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