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업 민영화 논란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시민일보
| 2008-08-26 18:08:34
정부가 수도사업 민간위탁을 추진하겠다고 하자 한나라당은 수도 전기 가스 분야에서 민영화란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수도사업 민영화를 둘러싼 혼란은 대운하 건설을 두고 당정이 하루가 멀다고 말을 바꾸는 모습과 닮은꼴이다.
수도사업의 민영화는 수도사업을 민간기업에 매각하는 영국 방식, 민간사업자가 지방자치단체와 양허(讓許)계약을 체결해서 운영권을 갖는 프랑스 방식, 지방정부가 민간사업자와 장기위탁계약을 체결하는 미국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도사업을 민간에 완전히 매각한 영국식은 마가릿 대처 정부 당시 영국 정부가 수도시설에 투자할 재원이 부족해서 택했던 방식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피노체트 정권하의 칠레가 세계은행의 권고를 받아 들여 영국식의 수도사업 민영화 조치를 취했다. 영국과 칠레의 수도사업 민영화는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에 걸쳐 수도요금은 올랐지만 수도사업을 공공부분에 두었던 나라도 수도요금은 올랐다. 1990년대에 세계경제는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에 선진국에 있어 수도요금 인상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 민영화를 하지 않은 스코틀랜드도 수도요금이 인상된 것은 똑같았다. 시설투자와 서비스 강화가 요금 인상으로 이어졌고, 소비자들은 그것을 수용한 것이다. 칠레의 경우는 빈곤계층에 대한 수도요금 보조라는 안전장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민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지방자치단체가 너무 작아서 각기 수도사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몇몇 지자체가 합동으로 민간업자에게 수도사업을 양허하는 방식이 일찍이 성행했다. 또한 프랑스는 하천수 취수 부담금, 하수 배출 부담금 등 물을 재화(財貨)로 보는 선진기법을 도입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돗물에 대해 프랑스 국민들이 완전히 만족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로 베올리아 등 굴지의 수도회사가 성장하게 되었다. 베올리아는 우리나라에도 진출해 있지만 사업성과는 그리 크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력 생산도 민간 발전회사가 담당하는 미국에서도 수도사업은 지방정부가 관장해 왔다. 다만 중소도시가 민간수도회사와 장기운영계약을 맺어 위탁하는 경향이 근래에 증가하고 있다. 후버 댐, 그랜드 쿨리 댐 같은 등 대형 댐이 연방정부 소유이고, 남서부 지역의 도수로(導水路)도 주 정부가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으로 건설한 데서 보듯이, 민간기업의 천국인 미국에서 ‘물’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영역’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일고 있는 수도사업 민영화 논란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왜냐하면 수도사업 민간위탁은 노무현 정부가 시작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수도법을 개정해서, 지방정부는 자격을 갖춘 사업자에게 수도사업을 위탁할 수 있도록 했다. 수도법 제23조 및 동 시행령 제36조는 한국수자원공사, 환경관리공단, 지방공기업, 그리고 관련법이 정하는 토목건축공사업자와 상하수도 및 환경 분야 법인이 지방정부의 위탁으로 수도사업을 위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수자원공사는 정읍, 논산 등과 위탁계약을 체결했고, 다른 몇몇 중소도시와도 위탁계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소도시들이 수도사업 위탁계약을 체결하게 되는 원인은 수도사업에 대한 중앙정부의 양여금 지원이 감축되어 시설투자 재원(財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수자원공사는 공기업이기 때문에 단기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고 투자할 수 있는 여력(餘力)이 있고, 기술력과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을뿐더러 조직문화가 공공분야와 유사하기
때문에 지방정부가 수도사업의 파트너로서 수자원공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마련한 수도사업 위탁경영 제도가 결코 한국수자원공사만 이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수도법은 한국수자원공사 외에 토목?환경 엔지니어링 회사도 수도사업 위탁경영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시?군이 한국수자원공사를 선호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가 수도사업 민간위탁을 허용하겠다고 공언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지금도 지방정부가 자체적 판단으로 위탁운영을 할 수 있는데, 정부가 이렇게 나서는 데는 어떤 ‘저의(底意)’가 있지 않은가 하고 궁금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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