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과 조정의 리더십

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김유진

| 2009-06-04 15:53:00

포스트모더니즘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도 집단공동체 개념 대신 개인주의의 영역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개인주의 발달은 인간관계에서 소모적이고 상투적인 부분을 배제한다는 관점에서는 환영받을 만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 반면 상대에 대한 몰이해나 무배려를 방지하기 위한 일정정도의 긴장감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다.

자칫 주관적 일탈로 인한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거나 개방적 사회생활에 전제된 최소한의 제약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책임성, 가치의 우열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기만의 진리와 취향에 충실함으로써 야기되는 평등성의 부작용 등이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하게 개인주의 발달로 인한 문제점을 고민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이제 더 이상 사회적 구성원 전체를 행복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시스템 가동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형태로 심화된 양극화 현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개인주의 발달은 양극화의 한 켠의, 소위 ‘가진 자’ 입장에서 보면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힘있고 똑똑하고 부자이기도 한 ‘그들만의 리그’를 더 강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집단의 극대화 된 ‘나’의 자유는 일반인의 범주에선 절대 짐작할 수 없는 규모의 스케일로 향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도 과거에 비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수준이 질적 양적으로 팽창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자유가 허용되는 건 머릿속 상상의 공간일 뿐이고 막상 현실에서는 ‘제한’이나 ‘금지’ 조항들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는 기형적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극대화된 정보가 현실의 간극을 더 크게 인식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이로 인해 엄청난 상대적 박탈감이나 소외감 등에 시달리는 반대편 진영의 우울의 깊이가 더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실정이 이렇다보니 급기야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리그’에 근접하고 싶은 욕망들은 그 해결책으로 개인 역량의 최대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지도자의 역할에 관심을 돌리기에 이르렀다.

마치 메시야의 출현을 학수고대하듯 역량 있는 지도자가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 현실만 해도 역대 어느 지도자 중 그 누구도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킬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결과 대통령 선거를 치를 때마다 기대치에 잔뜩 부풀어있던 국민들은 1년이 채 못돼 극도의 실망감으로 다음 메시야의 출현에 성급한 기대감을 표출하는 악순환이 반복돼 왔던 게 사실이다.

국민들의 성급한 요구는 지도자에게 부담이 되어 극단적 처방을 통해서라도 국민지지를 이끌어내고 싶다는 미련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미련은 신이 아니면서 신기를 발휘하고 싶은 허황된 욕망을 불러 일으켜 혹세무민의 '마약정책‘으로 이어지게 꼬득였다.

허술한 눈가림은 머지않아 탄로나게 돼 있고 그로 인해 다시 또 국민들은 우리가 원했던 메시야가 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술렁대며 지도자를 불신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 경기를 불황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주범이 된 과정을 돌아보자.

모두가 정권의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실제 범인은 개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존재할 수 없는 해결책을 요구했던 美국민이다.

행복하게 해달라는 자국민들의 아우성에 밀려 제3국의 권리를 강탈해서라도 충족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던 위정자의 어리석음이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대책 없이 은행 돈을 찍어내는 식으로 천문학적인 빚을 통해 정권의 부실을 가리고자 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막는 식의 임시방편으로 국민들에게 계속 잘 되고 있다고 거짓 그림을 보여줬던 것이다. 문제가 있는데 아무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바로 어제 기업회생관리절차에 들어간 미국 1위 자동차회사인 GM이 방치하다 붕괴시킨 미국 바벨탑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1908년 설립된 GM은 1960년 ~1970년대 세계 자동차시장의 30% 정도를 점유해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로 군림했었다.

결국 세계 경기 불황도 개인주의의 극대화가 초래한 부작용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탈개인화를 부르짖을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의 회귀 역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늦으면 늦을수록 희생과 대가의 용량이 커지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정확한 대차대조표를 고백하고 시스템 운영에 필요한 마스터플랜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시스템과 체제를 통해 ‘우리’와 ‘나’의 진정한 화합과 화해를 조정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와 우리가 저마다의 권리를 일정부분 포기하고 제한의 범주를 분담시키는 등의 고육책으로 난국 타개를 위해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정확한 공감대를 짚어주는 조정역할이 가능한 리더십 말이다.

큰 틀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조정능력을 가진 21세기형 지도자의 출현을 고대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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