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식보다 미술투자가 좋다>-예측 불허의 시장 논리

박정수 (작가·미술칼럼니스트)

김유진

| 2010-02-24 15:41:33

(박정수-작가?미술칼럼니스트)

예측 불허의 시장 논리

화랑을 경영하는 어떤 분이 아주 힘들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당한 게 분명했다.

들어보니 어느 기업 경영주 사모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1억원이 조금 부족한 어떤 작품이 있는데 구매하겠노라는 연락이 왔더란다.

그래서 다른 화랑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 작품을 1억원 조금 덜 되는 가격으로 구매하기로 하였단다.

그날 오전까지 구매하겠노라는 의사를 밝혀 의심 없이 작품을 자신의 화랑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오후 늦게 되어서야 구매 의사를 철회하겠노라는 연락이 왔다.

화랑간의 거래에서는 일단 작품 구매 의사를 확정한 후에는 작품을 다시 돌려주지 않는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되어 있다.

때문에 1억에 가까운 돈을 자신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어떻게 하든 해결은 하겠지만 신용만을 믿고 살 수 없는 곳이 미술시장이다. 이런 경우와 같이 수년 동안 화랑을 운영했던 사람조차도 늘 불안해해야 하는 곳이다.

그분은 그 작품을 어쩔 수 없이 떠안았지만 언젠가는 더 나은 가격으로 팔 수 있다.

하지만 1억이라는 금액이 본인이 원하지 않은 작품에 묶여 다른 좋은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경제 상황이나 시장 논리에 해박하고, 미술품 매매에 특별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면 미술시장에는 시장 논리가 없는가.

보통의 시장 논리와 마찬가지로 미술계도 시장 논리에 따라 판매가 이뤄지는 구조가 없지 않다.

만일, 기업 경영주 사모가 사고자 했던 미술품이 시장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갖고 있지 못한 작품이었다면, 중개하려했던 화랑에서는 그 미술품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작품에 관한 한 시장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구매가 가능했다.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거래의 중요한 요소이다.

미술품의 생명력이란 무엇일까. 미술시장의 미술품은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간다.

자신의 생명력 때문이다.

생명력, 한마디로 표현했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요소가 들어 있다.

작품의 가치, 선호도, 유행의 흐름, 시장의 투자 상황 등 온갖 요소가 집약되어 있다.

미술품은 혼자 그것들을 짊어지고 자신의 시장(가격과 거래)을 이끌어간다.

그 온갖 요소들이 미술품을 떠받친 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면서 거대한 흐름을 이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가격을 형성하는 미술품

“오늘 너무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청계천을 지나오는데 내 그림이 80만원에 걸려 있는 것이야. 어떻게 구한 것이냐 물어 봤더니 어떤 사람이 팔고 갔다 그러데. 참 나, 80만원이 뭐야. 그럼 내 작품이 호당 8만원밖에 안 나간단 말이야? 얼른 사버렸지. 여기 봐. 내가 몇 해 전에 판 그림인 거 같아. 누구한테 팔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야. 그리고 엊그제는 김포공항을 갔었는데 내 그림하고 똑같은 게 있더라구. 누가 내 도록을 보고 베낀 것 같아. 기분이 나빠서 주인한테 그랬지. 그림 내리라구. 뭐라는 줄 알아? 가짜가 있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거야.”

원로 여성화가가 어느 날 흥분해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나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몇 분되지 않은 여성 화가중의 한 분이셨는데, 지금은 작품 거래가 거의 없는 분이다.

이렇게 미술품이 화가의 손을 떠나 미술시장에 떠다니며 스스로의 가격을 형성한다. 작가가 아무리 호당 50만원에 판매했다 해도 구매한 사람이 미술시장에 호당 5만원에 팔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오히려 호당 5만원에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면 그것이 더 반가운 일이다.

싸게 나왔다고 본인이 구매해 버리면 시장의 흐름을 막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화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지금 작품가를 내릴 순 없지. 지금까지 내 작품을 사간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

화가들은 자신의 미술품을 팔면서 ‘자식 시집장가 보내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자식들이 너무 많다.

시집장가 보냈으면 그네들 스스로 살게 놔두어야 한다.

그 많은 자식들을 언제까지 끼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의 생명력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 500만원에 판 자신의 작품이 화랑 가에서 100만원에 거래가 된다고 해서 화가가 이를 막을 수 없다.

막아서도 안 된다.

자신의 자식들이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화랑가에서 100만원에 매매되는 미술품이 있다고 하자.

화가는 지금까지 500만원에 팔아왔다고 하면서 계속 500만원에 사가라고 종용한다.

그러면서 많이 깎아준다.

미술품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스스로 500만원이 아니라 100만원을 선택한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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