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이 우선한다, 독일 해적당, 스위스 파워포인트반대당의 교훈
최재천 17대 국회의원
안은영
| 2011-09-26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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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17대 국회의원)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에 반대하는 정당이 있다고? 파워포인트가 프리젠테이션을 왜곡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게 가장 좋을까? 우리나라에서라면 인터넷카페를 만들고 정모를 가지면서 1인 시위를 조직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당을 새로 만들 생각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종종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그들은 정당을 만들고 정당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적 방법’을 선택하기도 한다. 최근 소개된 독일의 ‘해적당’, 스위스의 ‘파워포인트 반대당’은 유럽에서는 흔히 있는, 정당을 통한 정치 참여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해적당은 파일 공유, 검열 반대, 정보 보호 등 인터넷 이슈와 사회문제 해결, 시민권 강화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에 참가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인터넷 세대들의 한 차례 객기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해적당은 지난 9월 18일 치러진 베를린 지방의회선거에서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 속에 무려 전체 투표의 8.9%를 획득했다. 독일 사민당, 기민당, 녹색당, 좌파당에 이어 제5당의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파워포인트 반대당은 이보다 훨씬 흥미롭다. 14년 경력의 스피치 강사 메시어스 포엠은 평소 ‘청중을 설득하는 것은 ‘사실’이지, 파워포인트 같은 기술적인 도구가 아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 생각을 나누기 위해 지난 5월 ‘파워포인트 반대당‘(APPP)을 창당했다. 창당 이유는 ’파워포인트 작성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스위스 경제와 산업, 교육과 연구 분야에 막대한 손실을 준다‘는 것. 지지기반에 대한 분석도 서툴지 않다. ’매달 학교, 회사 등에서 지루한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해야 하는 50만명의 스위스인과 전 세계 2억5000만명의 시민‘을 들었다. 포엠은 파워포인트 사용을 금지하는 국민투표 실시, 큰 종이에 직접 써서 설명하는 프리젠테이션 교육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10월 스위스 총선에 출마할 계획이다. 국민투표 등 직접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스위스이기에 그 향방이 주목된다. ◇우리는 왜 손쉽게 정당을 만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걸까? 이렇듯 유럽 사람들은 동네 모임 만들 듯 쉽게 정당을 조직하고 선거에 참여한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조직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주권의 하나로 생각하고 각종 정치관련법 또한 이런 절차와 제도를 보장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없는 걸까? 왜 정치를 끊임없이 불신하면서도 새로운 정치, 새로운 정당, 새로운 정강 등을 만들 생각은 해보지 않는 걸까? 왜 우리는 정당보다는 운동을, 선거보다는 시위에 더 많이 의존하는 걸까? 왜 우리는 유럽 사람들과 달리 정당은 뭔가 미덥지 못하거나 불순한 조직으로 생각하는 걸까? 역으로 왜 시민운동은 순수하고 헌신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 특유의 전통에서 답을 찾을 수도 있고, 기존 정당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태 탓일 수도 있다. 정치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재벌, 언론, 관료, 검찰, 정보기관들이 끊임없이 정치의 가치를 폄훼하는 영향 탓일 수도 있다.
◇소수파들의 원내 진출이 어려운 선거제도 그런데 유럽과 비교하면 한국만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그건 바로 선거제도다. 유럽 나라들은 유권자의 정당 지지율이 거의 그대로 의회 구성에 반영되는 비례대표제나 결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5% 전후 지지율의 문턱(threshold)만 넘으면, 군소 정당들도 쉽게 의원을 배출하고 주요 정당으로 발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역구에서 1위로 득표한 사람만 의원으로 당선되는 소선거구 단순다수제를 채택해 2위 이하의 후보에 대한 지지표는 모두 사표화된다. 2004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단순다수제의 한계를 보완하려 했지만, 그 비율은 전체 의원의 20%가 되지 않는다. 선거제도의 성격이 이렇다보니 지지기반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 않거나 지역구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할 만큼 높은 지지를 획득할 가능성이 낮은 정치세력은 정당을 통한 실천을 상상하기 어렵다. 유럽과 비교하면 기존 정당과 다른 이념, 다른 정책,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정당을 통해 의회에 진출하기가 운동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한국 선거제도의 조건이다. 결국 소수파의 현실 정치에 대한 진입 장벽은 거대하다. 결코 대표될 수 없는 사람들은 늘 정치에서 배제된다. 이들의 목소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현실 정치나 제도에 반영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포도가 신 탓이라고? 이솝우화의 한 대목. 여우는 포도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 포도가 높은 나무에 걸려있어 몇 차례 따먹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자 여우는 그 포도가 매우 시어서 맛이 없을 거라며 자신의 포도 따먹기에 대한 단념을 정당화한다. 한국에서 정치를 폄훼하고 정당을 부정하는 언술은 특히 정치 의지와 역량을 가졌음에도 정치권에 진출하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에서 자주 목격된다. 한편으론 얕은 이기심과 허위의식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잠재적 정치엘리트의 건강한 정치 욕구마저 좌절시키는 선거제도에 있다. 건강한 민주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를 결코 대의해낼 수 없는 선거제도, 정치제도, 의회제도에 있다.
단순다수제는 시민들의 삶의 근간을 이루는 지역 대표성을 강화하고 분명한 승자를 가려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사회의 다양한 이익과 요구가 대표되는 정치적 통로를 차단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물론 비례대표제는 그 보완의 효과를 갖는다. 그럼에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나치게 지역구 중심적인 정치구조의 한계가 우리 정치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는 5천만 명의 시민이 있고, 5천 만개의 각기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 이들의 생각을 정치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묶어내지 못하고 제대로 소통해내지 못한다면, 정치는 더 이상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시민의 생각과 정치 사이의 정전이다. 한마디로 블랙아웃(blackout)이다. 그 순간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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