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백 국회의원] 마키아벨리와 정치

안규백

| 2013-12-01 14:56:34

▲ 안규백 국회의원 마키아벨리(즘)하면 우리는 곧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사악하고 교활한 권모술수의 정치나 정치인을 떠올린다.

특히 우리에게 정치는 흔히 당리당략, 파벌, 위선, 포퓰리즘, 정경 유착 등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정치 불신으로 인해 냉소적 태도가 팽배하고 네거티브 성향이 강해 지지보다는 반감 표현에 훨씬 익숙하다. 유독 정치 분야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이익 계산보다 감성 의존이 높다.

또 정치적 위선을 필요이상을 혐오한다. 보수파가 하면 괜찮을 일도 개혁파나 진보파가 하면 펄펄 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왜곡된 국민 정서와 뿌리 깊은 불신은 국민 통합과 사회 변혁의 방법으로서 정치의 가능성과 규범성을 해칠 우려가 높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인식이 자신의 의도도 과연 그러한지 아니면 어떻게 왜곡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물론 극단적 정치 불신의 개념인 왜곡된 형태의 마키아벨리즘을 극복하고 공공의 도구로서 국가, 현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의 자율성’에 대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500년 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와 이탈리아 통일에 대해 우리와 비슷한 열망을 품고 살았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세를 넘어 근대의 문을 연 르네상스 시대였다.

당시 이탈리아 전체는 그의 조국 피렌체를 포함하여 교황령 국가,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등 5개의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의 침입에 시달리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가 출현하여 이탈리아 국민들의 자유와 재산을 보장하고 번영을 이룩해주기를 열망했다. 그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등의 불후의 명작을 남겼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운하게 최후를 마쳤다.

마키아벨리즘은 대략 3가지 의미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의 도덕적 선·악에 관계없이 정치적 행위의 효율성과 유용성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정치적 사상을 지칭한다.

둘째, 공공의 이익이 아닌 자신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적 행위와 관행을 가리킨다.

셋째, 정치적 범주를 넘어 넓은 의미의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리낌 없이 남을 희생시키는 처세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마키아벨리즘으로 세 번째 경우를 떠올리지만 그의 생각에 가장 충실한 해석은 첫 번째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는 언제나 국가 이익의 추구라는 목적과 정치라는 영역 내에서만 정치적 효율성과 유용성을 추구하였다.

정치적 영역에서 그가 도덕적인 덕보다는 권력의 기술문제에 골몰했다고 해서 정치와 도덕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그는 사적인 영역에서 남을 잘 믿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유덕한 행위이지만 공적 영역에서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는 인간의 이기심과 재화의 희소성으로 폭력과 기만이 난무하고, 한 개인의 사활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사활이 걸린 정치영역에서 유덕한 행위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적 영역에서 남을 속이거나 잔인한 행위는 유덕한 행위가 아니지만 공적 영역에서는 전체 공동체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유덕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이 점은 막스 베버가 구분한 ‘확신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중 ‘책임의 윤리’로 해석할 수 있다. ‘확신의 윤리’는 동기가 선한 행위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나쁜 결과가 나오면 그것은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불합리한 세상의 책임이다.

반면, ‘책임의 윤리’는 인간의 평균적인 악을 전제하고 이를 감안하여 행동해야 하며 따라서 동기의 선함보다는 결과의 선함이 더 중요하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는 항상 사적인 윤리에 반하는 행동이 적합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윤리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 정치적 상황의 특수성과 한계를 강조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정치 상황이란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evil)’과 ‘차악(less evil)’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속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매우 현실주의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국가 이익을 위해서 정치 영역에서 윤리적 가치를 초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행위의 자율(성)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그는 정치적 ‘자율’을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원래 포르투나(운명)는 인간의 자율성을 가장 위협하는 핵심 존재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도전할 수 없는 절대 불변의 신의 섭리나 질서도 아니다.

다만, 운명은 여성이어서 예측할 수 없고 변덕이 심해 다루기 어렵지만, 인간의 권능과 개입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반면 비르투는 운명의 권능에 대항할 수 있는 남성적인 용감함, 대담함, 활력 또는 역량을 나타내며 운명의 여신과 짝지어 나타난다.

따라서 그는 운명(포르투나)이란 우리 행위의 상당 부분을 주재하지만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의 스스로의 통제와 역량(비르투)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군주론」 25장에서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신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고 결론짓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운명은 여신이므로 그녀는 항상 젊은 사람들에게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이익과 그 실현을 위한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는 사적인 윤리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인간이 도전할 수도 벗어날 수 없는 기독교의 신적 질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역량 있는 정치 지도자는 다루기 어렵지만, 매력적인 여성을 과단성 있게 사로잡는 남성처럼 정치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그는 인간의 본성과 국가의 본질을 파악하고 정치적 자율성 개념을 통해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현대인보다 더욱 현대적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치에 대한 불신과 관심이 병존하고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현상은 한국 정치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미 오래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고백했듯이 신자유주의로 인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시장 만능주의는 공공성을 파괴하고, 국가가 소수 권력 집단의 도구가 되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또 그 필연적 귀결인 극심한 양극화로 민생 경제는 피폐해지고 일방적 우월주의는 남북한 평화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의 무력화와 퇴행이 초래하는 위기는 정치의 복원을 통해 경제에 대한 정치의 통제력을 다시 확보함으로써 풀 수 있다. 참여한 사람들의 공동 관리·운영으로서 정치가 회복되어야 정의와 복지, 평화로운 우리 공동체의 미래도 가능하다.

부디,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신을 걷고 올바른 정치라는 나무에 물도 주고 거름을 줘서 우리의 쉼터를 만들자. 우리 모두의 정의로운 관심과 적극적인 실천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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