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닐 호세의 '에르미따'
이기문 변호사
이기문
| 2013-12-18 16:41:01
에르미따는 1945년 일본의 침략을 받은 필리핀에서 미국이 탈환을 시작한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한다. 에르미따는 부유한 로호 가문에서 태어난다. 에르미따의 어머니 콘치타는 로호가문의 딸로서 스페인 식민지이던 시절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상태에서 퇴각하는 무명의 일본군으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아이를 출산한다. 그 아이가 에르미따였다. 그리고 어머니 콘치타는 미군 장교와 결혼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수도원에서 자란 에르미따는 우연히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정상적인 출산이 아니었기에 콘치타는 에르미따를 언니에게 맡기고, 언니 펠리시타스는 에르미따를 보육원으로 보낸다. 에르미따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언니는 보육료를 간간히 보낸다. 그리고 에르미따는 어섬션 여학교를 다니게 된다. 총명한 아이였다. 에르미따의 미모는 아름다웠다. 보육원을 나오면서 에르미따는 이모 펠리시타스가 지배하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에르미타의 처지는 운전수와 요리사 등 집안의 하인들과 다를 바 없다. 이모는 학비와 최소한의 용돈을 줄 뿐 가족으로서의 애정과 관심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결국은 에르미타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집안의 일원으로서 제 몫의 유산을 요구하자 가차없이 내쫓아 버린다. 사랑없이 자란 에르미따의 복수심은 한없이 자라기만 한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에르미타는 친척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마침내 그녀는 미군이 주둔하던 시절, 창녀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에르미따를 인정하지 않은 로호 가문! 혁명으로 스페인 사람들을 몰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호세 로호는 동료 메스티소와 함께 혁명 자금을 뒤로 빼돌려 땅을 샀고, 그렇게 재산을 축적한 부패한 가문이다. 그러한 가문속에서 태어난 에르미따, 그러나 에르미따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호세 로호가문은 전쟁이나 혁명에서는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마지막에 승리를 얻는다는 이상한 현실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이상한 현실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일 수도 있다.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된 에르미따는 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게 된다.
그녀의 선택에는 그에게 영문학을 가르친 여교수 호노라토의 말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만약 매춘을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신념 없이, 생존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을 위해 하는 행위라고 가정하면, 누가 진짜 매춘부일까요? 주위를 돌아보세요. 그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어요. 가면을 쓰고 인격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정치가, 제복을 입은 사람들, 기업가, 작가들 그리고 언론인들도 아주 많지요. 그래요. 교수들도 예외는 아닐 거예요.”
에르미타가 자신의 몸을 무기로 돈과 권력을 획득해 가는 과정은 다소 통속적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미모는 너무도 출중해서 모든 남자들이 그 매력에 빠질 정도다. 그녀는 분명 비천하고 속된 행위에 자신을 맡기는 인물이지만, 영혼의 고결함과 인격적 품위를 결코 잃지 않는다.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의 몸뚱이를 탐하는 수컷들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혼과 소통하고 그녀의 인격을 보호하고자 하는 남자들 역시 모여든다. 저택 운전수의 아들인 맥, 전직 역사교수이자 현직 브로커인 롤란도 크루즈, 그녀와 결혼하는 미국인 사업가 앤드루 메도스 등이 그들이다.
통속의 절정은 에르미타가 친어머니 콘시타와 이모 펠리시타스, 외삼촌 호셀리토 삼형제에 대한 복수로 이어진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어머니의 남편인 존 콜리어를 유혹한 다음 그에게 자신의 출생 비밀을 폭로하고 그와 정분을 나눔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하고 마침내 그 가정을 파탄시킨다. 펠리시타스는 오래된 성추문을 언론에 터뜨림으로써, 그리고 동성애자인 호셀리토는 젊고 매력적인 청년을 동원한 끔찍한 사건을 통해 각각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에르미따>가 에르미따라는 불우한 창녀의 개인적 복수극만인 것은 아니다. 소설의 더 큰 무게 중심은 작가가 보는 바 조국 필리핀의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 두어진다.
성 문제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상층부는 보수적인 것 같지만, 실제내부는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나 매춘을 하는 모습이 투영된다. 일전의 법무차관의 성접대 파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입법자들은 이에 대하여 아예 외면을 하는 상태이다. 아마도 향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입법자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골프투어를 즐기는 사람들이 한국에서 금지된 성매매를 타국으로 가서 즐기고 오는 현상에 대하여 그들은 끝내 침묵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성매매 문제는 사회적 효율성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주제임을 이 소설은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필리핀 사람들은 일본인을 경멸하고, 그리고 미군을 해방자로 존중한다. 에르미따는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행해지는 필리핀 상류사회의 부패와 향락에 대하여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다. 그녀는 브라보 상원의원, 언론인 단테스, 봄빌라 장군 등 고위 관료들을 상대하고 이용하며 그들의 비굴함과 부패함을 고발한다. 소설은 에르미따에 굴복하는 상원의원, 언론재벌, 장군 등 필리핀 지도층의 부패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에르미따가 창녀생활을 하면서, 그녀가 겪는 필리핀 상류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에르미따는 원래 ‘은둔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호세는 “소설에서의 매춘은 부패하고 타락한 필리핀 고위층에 대한 은유”라고 지적했다. 호세는 이병주 국제문학제에 참석한 바 있다. 그는 에르미따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하고 “작가들은 언제나 자기 민족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지적했다.그는 한국교포를 며느리로 둔 지한파 작가이기도 하다. <에르미따>는 문학의 사회비판적 기능을 온전히 보여준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콜란도 크루즈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서 예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지만 결국은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된다. 당시 필리핀의 지배층을 구성하던 ‘메스티스’는 스페인계 혼혈이며 스페인의 식민지일 때도 그들은 굳건히 지배층을 형성하여 부를 축적한 집단이다.
필리핀의 유명한 가문의 부는 배신고, 부패 등으로 이루어진 부임을 고발한다. 호셀리토 로호도 역시 아퀴날도의 편에서 같은 입장을 취했었지만 미국이 위협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재빨리 입장을 바꾸어 반대편과 손을 잡는다. 필리핀이 부패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필리핀 자본이 외국의 자본시장에 투자하여 상당한 채무를 안게 되는 과정도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창녀 에르미따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버림받은 에르미따의 복수극만으로 볼 수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에르미따와 아니타의 딸 릴리가 하는 나누는 대화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릴리를 걱정하는 아니타는 자신의 딸이 나쁜 남자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같이 창녀의 삶을 살게 될까 걱정을 한다. 하지만 릴리가 살려고 했던 삶은 그게 아니었다. 릴리는 에르미따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가공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에르미따와 자신의 엄마가 베풀어준 안락한 세계를 벗어나면 부끄럽고 혹독한 현실이 있다는 것을 릴리는 너무 일찍 알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나 여태껏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며 투쟁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릴리는 달랐다. 릴리는 자신의 친구들과 밖의 사람들이 중요했고, 건물 벽이나 길에 페인트로 구호만을 적어놓고 투쟁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깊고 넓은 방법으로 시위에 참가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쳐 나갔다.
이런 릴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의 대중의 침묵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보게 된다. 부당한 현실에 대하여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 쪼들리는 가난에 시달리던 과거를 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안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 스스로 개척하지 않고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바로 이들이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인게다.
에르미따도 역시 그들과 다름없이 살았지만 언젠가는 운명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스스로의 운명을 정당한 방법이든 아니든, 개척해서 원하는 사회적 위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단순한 사고에 머물렀던 에르미따와는 달리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젊은 소녀 릴리의 모습이 바로 필리핀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최근의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부당함에 저항할 줄 모르고 침묵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래도 이들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바로 릴리의 모습이 아닐까?
정말로 세상의 부정과 부패를 릴리와 친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이라면서 침묵하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 아닐까?
복수를 마치고 에르미따는 다시 마닐라로 돌아온다. 그녀는 보육원의 콘스탄시아 수녀를 찾아간다. 세월의 흐른 만큼 수녀도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녀는 에르미따를 알아보지 못하며, 에르미따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끔찍한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이어간다. ‘그 애는 죽었고, 끔찍한 사고였고, 에르미따 로호는 죽었다.’고 말하는 콘스탄시아 수녀의 말로 소설은 끝이 난다. 작가의 절규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가득하다. ‘아름다운 조국이 내 민족에 의해 파괴되어 가고 있기에 나는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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