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종 칼럼] 꼴찌에게 갈채를
홍문종 국회의원
홍문종
| 2016-08-25 14:31:28
치열하고 냉정한 승부의 현장에서 사력을 다하는 선수들과 함께 울고 웃던 순간이 어느 새 아련한 그림이 되어 추억의 장을 넘어가고 있다.
특히 메달과 상관없이 올림픽 정신의 진수를 보여주며 갈채를 받았던 몇 몇 선수들에 대한 잔상이 남긴 여운이 깊다.
그 중 니키 햄브린(뉴질랜드)과 애비 디아고스티노(미국) 선수가 18번째 ‘쿠베르탱 메달’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신선한 감동이었다.
‘쿠베르탱 메달’은 스포츠 정신을 고양시키고, 스포츠 부흥을 위해 노력한 선수, 코치, 스포츠행정가, 저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IOC가 답례차원에서 만든 상인데 여자 육상 5000m 예선전 당시, 상대의 실수로 경기를 포기하게 되는 극한상황에서 두 선수가 보여준 인간애를 지켜봤다면 더할 나위없는 최적의 선정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실적 중심의 경쟁으로 치우치고 있는 올림픽에서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금메달보다 더 권위있는 평가로 이들의 행적을 기리고자 한 IOC 결정에 큰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왜곡으로 일그러진 응원문화는 여전히 아쉽다.
메달 숫자가 국가 간 국력과시의 전시장으로 변하면서 올림픽이 1등의 영광만 존재하는 장마당으로 전락된 지 오래다.
오로지 금메달에 위한 잔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승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장에서 4년 동안 피땀으로 올림픽을 준비해 온 선수들의 노고는 안중에 없다. 심지어 은메달, 동메달에 머문 선수들을 낙오자로 찍어 죄인처럼 몰아세우는 어이없는 상황도 낯설지 않다.
동네도 아닌 대한민국을 대표해 올림픽 무대에 선 이들이다.
더구나 금메달을 향한 절실함으로 본다면 누군들 당사자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금메달의 금의환향도 좋지만 노메달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를 더 이상 모욕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이 작은 배려가 또 다른 가능성을 성사시키는 엄청난 에너지원으로 바뀔 수 있음을 경험한 바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통 큰 격려로 구원의 화신을 자처하시는 어머니가 계신 나는 엄청난 행운아임을 고백한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입시에서 좌절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노라면 “문종아, 파이팅이다. 넌 반드시 해낼 수 있다”며 변함없는 믿음으로 힘을 주시고 논문이 안 풀려 고심할 때도 “박사학위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안되면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면 된다”고 격려하며 토닥토닥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지금은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일찍이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작품을 통해 "모든 영광은 1등에게만 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꼴찌에게도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확장성 측면에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으로 패자부활을 허용하는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1등만 추려내기보다 꼴찌들이 성공스토리를 쓸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회가 더 나은 성과를 담보하는 정황이 많다는 결론이다.
예수의 열두제자나 이현세 선생의 ‘공포의 외인구단’의 성공 사례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제대로 부여된 동기만으로도 얼마든지 무에서 유를 창출할 수 있고 그렇게 일어선 꼴찌들의 뒷심이 또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꼴찌에게 보내는 박수를 아끼지 말자.
내친 김에 패자부활의 새로운 신화로 대한민국을 올림픽 강국으로 팍팍 밀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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