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한국정치 (2)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공희준

공희준 | 2016-11-15 09:00:00

공희준 정치컨설턴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만 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부분의 유명하고 악질적인 고등 사기꾼들이 거의 예외 없이 허언증 환자인 이유다.



방향을 돌려서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누구일까?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보수적인 인간들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믿고 있는 보수적인 인물이다. 힐러리가 한 벌에 1만 2천 달러나 나가는,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천 4백만 원이 넘는 고가의 아르마니 외투를 입고서 소득 불평등에 관한 연설을 태연히 행할 수 있었던 까닭도 그녀가 스스로를 진보 성향의 정치인이라고 생각 또는 착각한 데 있었다. 내가 진보인데 그까짓 값비싼 의상이 뭐가 문제냐는 독선과 오만이, 한 회에 수십억 원에 달한다는 천문학적 액수의 강연료가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무신경과 무감각이 미국 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노리던 클린턴의 발목을 백악관 문턱에서 붙잡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의미다. 관건은 변화의 방향과 내용이다. 잘된 변화는 발전과 진보를 낳고, 잘못된 변화는 타락과 반동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잘못된 변화보다도 더 나쁜 경우가 있다.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한사코 부인할 때다.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믿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모순과 자가당착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자기가 예전의 자기가 더 이상 아님을, 자신이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를 그들은 모르거나, 알려고 들지 않는다.



나는 남편 빌 클린턴과 나란히 백악관에 입성할 당시의 힐러리 클린턴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녀는 워싱턴의 구태의연한 기성정치에 용감하게 도전장을 던지던 당차고 풋풋한 개혁가의 표상이었다. 그때가 1992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에 돌풍을 일으켰을 무렵이니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1992년의 힐러리와 2016년의 힐러리는 똑같은 사람이 단지 나이만 먹었다고, 얼굴에 주름살만 늘어났다고 평가하기에는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1992년의 힐러리 주위에는 햄버거로 식사를 해결하던 젊은 참모들이 있었다. 2016년의 힐러리 곁에는 고급 정장을 차려 입고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의 한 달치 월급을 한 끼 먹는 데 가볍게 써버리는 노회한 펀드 매니저들이 득시글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1992년의 힐러리에게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부르짖던 청년 시절의 저항정신이 아직 살아 있었다. 2016년의 힐러리로부터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윤 증대를 위해서라면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당장 기꺼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호전적 제국주의자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평화운동가에서 무기회사들의 로비스트로 변해버린 전직 국무장관 힐러리가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곳들 가운데에는 우리 8천만 한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도 유감스럽게 들어 있었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은 스스로가 진보라고 여전히 철석같이 믿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유엔 사무총장을 최순실이 박근혜 다루듯 머슴처럼 부릴 수 있다는 미합중국의 국무장관으로, 궁극적으로는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띄워준 원동력은 다름 아닌 ‘진보 정치인’이라는 한 꺼풀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대선기간 내내 힐러리를 거짓말쟁이라고 거칠게 비난해왔다. 클린턴은 트럼프를 막말 대왕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면서 맞불을 놓았다.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이겼다. 트럼프의 막말은 누가 들어도 저질스러운 막말이었지만, “나는 진보다”라는 힐러리의 빤한 거짓말에는 힐러리 본인만 속아 넘어간 탓이다. 세상을 모두 속이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속여야 하지만, 자기 자신부터 속이는 일에 성공했다고 해서 세상을 모두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진보였으되 현재는 진보가 아닌 자칭 진보주의자 클린턴에게는 따라서 한 가지 정체성만이 오롯이 남았을 뿐이었다. 엘리트라는 정체성이 그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힐러리가 상대적 약자인 여성인 까닭에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부당한 여성혐오 곧 여혐의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분위기인데 이는 정답을 비껴가도 한참 비껴간 엉뚱한 오답이다.



힐러리는 여성이라서 선거에서 진 것이 아니다. 때 묻고 케케묵은 엘리트라서 미역국을 마시고 만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중앙정계에 진출한 이후 사반세기 동안을 전형적인 인사이더의 길만을 걸어온 엘리트의 끝판왕이자 인사이더의 최종 보스와 같은 존재였다. 만약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가 공화당의 ‘힐러리 트럼프’ 대 민주당의 ‘도널드 클린턴’의 대결로 치러졌어도, 쉽게 말해서 양쪽 후보의 성(性)이 바뀌었어도 나는 여자인 힐러리 트럼프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성혐오 담론은 워싱턴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서민대중의 분노의 초점을 흐리고, 미국의 낡은 기득권 질서를 향한 가난한 노동계급의 반감을 희석시키려는 위선적인 엘리트 지식인들의 교묘한 말장난 내지는 사악한 프레임 바꿔치기 시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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