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를 부탁해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공희준

  | 2016-11-16 16:19:25

▲ 공희준 정치컨설턴트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대통령처럼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국가원수의 건강은 함부로 공개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급 국가기밀이다. 따라서 첩보기관들은 적국 국가원수의 건강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정말 별짓을 다한다. 서구 자본주의 제국(諸國)들과 동구 사회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한창 격화됐을 즈음, 미국을 방문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의 대변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그가 투숙한 호텔방 변기의 배관 구조를 은밀히 바꾸면서까지 기를 쓰고 확보해간 까닭이다.



우리는 어떤가? 현직 대통령의 배설물도 아닌 그야말로 생피가 일반 병원에서 마구 돌아다니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가난한 비정규직 무명작가 주제에 있는 돈, 없는 돈 모조리 탁탁 털어가며 딸아이를 강남 차병원에서 낳게 한 사람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는 ‘차움’이라는 의료시설이 어디에서 뭐하는 곳인지 전연 몰랐다. 박근혜 정권은 국민들에게 헌법 공부에 이어 의학 공부까지 하도록 부추기는 셈이다. 원조친박 전여옥씨는 불쌍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국민들도 덩달아 불쌍해진다고 일갈한 모양인데, 대통령이 무식하면 국민들은 되레 유식해지는 역설이 빚어졌다고 하겠다.



최순실씨의 피라며 드라마 여주인공의 이름을 빌려 차움에 맡겨진 대통령의 혈액이 무슨 용도와 목적으로 쓰였는지는 아직은 미스터리다. 그런데 궁금한 부분은 또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의 갑작스러운 청와대 영수회당 제안이 누구의 뜻으로 이뤄졌는지가 그것이다. 차움에 맡겨진 피가 사실은 길라임의 피도 아니고 최순실의 피도 아니고 박근혜의 피였듯이, 거대 공룡야당의 당수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 나누려던 얘기가 추미애 자신의 얘기인지, 아니면 다른 제2, 제3의 인물의 얘기였는지 궁금증이 생겨난다.



일각에서는 박근혜를 공격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할 때 왜 뜬금없이 더불어민주당에 칼끝을 돌리느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심하자.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공격은 여의도 안의 제도권 정당들과, 여의도 밖의 국민들이 앞뒤에서 청와대를 포위하는 일사불란하고 효과적인 협공 형태를 띠어야만 한다. 그래야 박근혜 퇴진이라는 국민의 뜨거운 여망을 조기에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의도만의 단독 작전은 화력과 명분이 약하고, 국민들만의 독자적 공세는 원치 않은 희생과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허나 현재의 객관적 상황은 국민과 여의도가 철저히 겉도는 형국이다. 국민들은 박근혜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대한민국 국가원수 겸 정부수반으로 행세하는 꼴을 더는 못 봐주겠다는 의미다. 반면에 야당, 특히 언필칭 제1야당이라는 더불어민주당의 당권을 꽉 잡고 있는 친문세력은 뭐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 국민의 민심을 받드는 일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는 데 더욱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웬만한 20대 청년 못잖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걷고, 달리고, 오르는 모습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불과 몇 달 전에 요란하게 과시한 바가 있다. 그런 문재인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이 본격화된 다음에는 거북이나 굼벵이를 연상시킬 만큼 지독히 느린 속도로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그는 유력 대선주자들 가운데 박근혜 퇴진 촉구 촛불시위에 가장 늦게 합류했다. 문재인이 뒤늦게 부랴부랴 마련한 기자회견은 영락없는 뒷북치기의 인상만을 국민들에게 줄 뿐이다. 야권 일부에서는 문 전 대표의 긴급 기자회견이 박근혜 대통령 압박용이 아니라 당내 반발 진압용이라는 분석마저 내놓고 있다.



국민들은 물론이고 순둥이라고 손가락질받아온 안철수 의원조차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며 단호한 결기를 보여줬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는 강북 도심을 통과하는 대중교통의 운행횟수를 증편해 박근혜 퇴진 운동에 간접적으로 힘을 보탰다. 이재명 성남시장 같은 경우는 박근혜 대통령을 아예 구속시켜야 한다는 초강경 발언을 연일 내놓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민심과 따로 노는 두 개의 외딴 섬이 있다. 한 섬은 박근혜가 있는 청와대이고, 또 다른 한 섬은 문재인이 실효적으로 그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다.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당장 물러나라고, 즉각 퇴진하라고 도끼눈을 뜨고서 대차게 명령할 때 문재인의 더민당은 청와대를 향해 다소곳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하야를 부탁한다고.



이 세상에 다소곳한 자세로 비굴하게 하야를 부탁, 아니 구걸하는 소심한 새가슴 야당의 청을 흔쾌히 들어줄 착한 집권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정당성과 합법성을 모두 완전히 상실한 불의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은 힘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정답이고 정의다. 그리고 그러한 힘에는 국민들의 민심과 같은 제도권 밖의 힘과 함께 국회의 탄핵 발의처럼 헌법에 명시된 제도권 안의 절차적 힘도 존재한다.



제도권 밖의 힘은 100퍼센트 발휘되었다. 이제는 제도권 안의 힘이 동원될 차례다.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은 의회의 탄핵 절차가 개시된 이후에야 닉슨이 자진 사임을 마지못해 결심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국회가 탄핵 절차를 밟기 시작하면 박근혜 정권의 수명을 오히려 연장해줄 뿐이라는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이자 음흉한 궤변인 이유다.



박근혜 탄핵의 총대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배출한 더불어민주당이 싫든, 좋든 당연히 메야 한다. 그게 국민 일반의 공통된 바람이고 보편적 인식이다. 민주당이라는 당명의 정당은 참여정부 최고존엄을 이미 탄핵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는 일에는 결정장애 환자처럼 유달리 한사코 미적거리는 탓에 사꾸라니, 관제 어용야당이니, 제2의 민한당이니 하는 온갖 오명을 자초하는 것이다.



만약 더불어민주당이 청와대를 향해 마치 노예가 주인에게 간청하듯이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야를 부탁해”라고 소심하게 호소하는 짓만을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되풀이한다면 국민들은 대선과 총선 전부 다시 치르자고 거세게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의 청와대도, 문재인의 더불어민주당도 끌 수 있는 시간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너무 늦기 전에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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