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 The Revolution Must Go On!
공희준
siminilbo@siminilbo.co.kr | 2016-12-10 09:59:08
정세균 국회의장의 입에서 탄핵 가결이 선포되자마자 내가 있는 사무실과 가까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군중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한마디로 축제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12월 9일 오후의 흥겨운 잔치마당에 마음 편하게 선뜻 합류도, 동참도, 편승도 할 수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든 직무와 권한이 정지된 그 순간에조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87년 헌법체제라는 이름의, 소위 자본주의 시장질서라는 이름의, 직업공무원 제도라는 이름의 낡고 무능한 기성 체제에는 시쳇말로 사소한 기스 하나 나지 않은 까닭에서였다.
단적으로 박근혜가 청와대 귀퉁이에서 폐서인처럼 숨만 쉬고 있게 됐다고 해서 당장 개성공단 재가동의 전망이 밝아졌는가? 수십조 원의 천문학적 혈세를 강바닥에 허망하게 처박아버린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정비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관료 한 명을 국민들 맘대로 자를 수 있는가? 아버지 주방에서 닭 튀기시고, 어머니 홀에서 서빙하시는 평범한 서민가정의 자녀들에게 깊은 울분과 크나큰 좌절감을 안겨준 로스쿨 중에 단 한 개라도 즉각 폐교시킬 수가 있는가?
시선을 대선시계의 초침에 가속도가 더해진 여의도 현실정치로 돌린다면 최근 폭발적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열혈 지지자들에게는 속 터지는 지적이겠지만 문재인 전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짜인 더불어민주당의 불공정한 기존 경선규칙에 메스가 가해지겠는가? 비노와 비문들이 진즉에 학을 뗀 더민당의 무원칙하고 편파적인 경선규칙은 ‘기울어진 운동장’도 모자라 아예 ‘움직이는 운동장’이 돼버린 지 오래인데도.…
냉정히 관찰하자면 박근혜 탄핵만으로 실제로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 왜냐? 박근혜는 작게는 최순실의 공범이고 얼굴마담이었지만, 크게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87년 체제라는 이름의, 직업공무원 제도라는 이름의. 소위 자본주의 시장질서라는 이름의 낡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시스템의 수혜자이자 꼭두각시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은 로션 하나 바꿨을 뿐인데도 인상이 확 나이질 수 있다. 반면에 낡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시스템은 최고 권력자 하나 갈아치운다고 해서 그 본질적 성격과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라는 명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오랫동안 지겹게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소심증과 울렁증이 생각나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인은 천성적으로 혁명을 할 수 없다는, 일제가 심어놓은 간악한 식민사관의 연장선처럼 느껴져 몸서리가 쳐지기 일쑤였다.
그렇다. 표면적으로는 보수를 참칭하든, 또는 진보로 행세하든 거의 모든 한국의 주류 엘리트들은 “한국인은 혁명을 할 수 없다”는 잘못된 고정관념과 그릇된 패배주의를 국민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주입시켜왔다. 대중에게 오도된 인식을 주도면밀하게 불어넣어 민중을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교묘한 정치공작을 우리는 보통 ‘세뇌’라고 부른다.
명예혁명이라고? 평화혁명이라고?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물론 선의를 갖고서 명예혁명을 칭송하고, 평화혁명을 찬양한다. 그렇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듯이, 21세기의 한국에서 명예혁명이나 평화혁명은 조지 오웰이 그의 유명한 정치풍자 소설인 「1984년」에서 언급한 신어(New Speak)와 의도와 목적이 똑같다. 「1984년」의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운위하는 평화와 진실이 사실은 전쟁과 거짓을 함의하는 것처럼, 2016년 가을 이후의 남한에서 명예혁명을 주장하고 평화혁명을 부르짖는 것은 내심으로는 혁명하지 말자는 소리다.
따라서 명예혁명은 “지금 이대로”로 직역돼야 맞다. 평화혁명은 “이쯤에서 그만하자”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친박이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불귀의 객이 된 현재, 한국사회 최대․최강의 보수반동적인 수구기득권 집단으로 자리매김한 문재인의 친문세력이 유달리 평화혁명을 강요하고, 명예혁명으로 국민들의 뜨거운 가슴을 급속냉각시키려고 시도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박근혜만 바뀌고 다른 모든 것은 종전과 하등 변함없이 현상유지가 되는 “지금 이대로”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상태인 데 있다.
혁명의 시작을 계획할 수는 있다. 허나 혁명의 중단마저 계획할 수는 없다. 혁명의 수문을 여는 것은 일부 정치세력의 정치공학적 책략만으로 가능하다. 허나 장강을 이루어 도도히 흘러가는 거대한 혁명의 물결을 특정 정파가 인위적으로 제어하거나 관리하는 일은 엄밀한 과학적 견지에서도, 엄숙한 도덕윤리의 관점에서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혁명의 활시위는 이미 당겨졌다. 이제부터는 혁명이 가자는 대로, 민중이 향하는 곳으로 우리의 대오와 전열이 흐트러지지 말아야만 한다. 나는 혁명이 가려는 세상이, 민중이 향하는 나라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대신에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하고 명징하게 알고 있다. 혁명이 가고자 하는 데가, 민중이 닿기를 바라는 장소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87년 헌정체제라는 이름의, 직업공무원 제도라는 이름의. 소위 자본주의 시장질서라는 이름의 낡고 부패하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앙시앙 레짐 즉 구체제가 아니란 점만은.
박근혜와 문재인이 얼굴마담 겸 꼭두각시 역할만 슬그머니 바통 터치할 낡고 무능한 구체제 너머로 힘차게 나아가려는 우리들의 꿈이 현실에서 이뤄지기 전에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박근혜 탄핵은 우리 모두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국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도전과 모험의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따름이다. 따라서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The Revolution must g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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