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의 동사무소, 반기문의 여행사, 문재인의 상조회사
공희준
siminilbo@siminilbo.co.kr | 2017-01-16 09:00:00
한때 유엔 사무총장이 청소년들의 로망인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MBC 문화방송에서 방영되어 폭발적 시청률을 기록하며 나중에 중국에까지 수출된 김수현 작가 각본의 인기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에서 여자 주인공인 하희라의 극중에서의 원래 꿈이 오죽했으면 유엔 총장으로 묘사되었겠는가? 반기문, 잘난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허나 반기문은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이되 낡은 사람이다. 그는 민심과는 동떨어져 특권적 삶을 살아온 선출된 엘리트들이 국정을 독점적이고 폐쇄적으로 운영하던 시대의 문화와 관행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물증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언론에 보도되는 반기문 참모들의 면면을 보니 3분의 2가 외교관들이었다.
외무 관료로 도배된 반기문의 사람들을 보고서 나는 출범을 했는지 결국은 출범을 하지 못한 것인지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인 고건 전 국무총리의 대선캠프가 문득 기억이 났다. 고건씨가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를 저울질하며 부지런히 간을 보고 있을 무렵, 고건 대망론에 들떠 있던 선배 한 명을 우연히 만나 고건의 핵심 참모가 누구인지를 질문한 적이 있었다.
김영삼에게는 김동영과 최형우가 있었다. 김대중에게는 권노갑과 한화갑이 있었다. 참여정부 최고존엄에게는 안희정과 이광재가 있었다. 이명박에게는 이재오와 정두언이 있었다. 그런데 고건에게는? 자세한 실명까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고건의 양팔은 정통 내무 관료 출신인 인물들이라고 했다.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 “무슨 동사무소 차릴 일 있어요?”라는 반문과 함께 나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관존민비의 선민의식과 상명하달의 비민주적인 수직적 사고방식이 뼛속까지 박혀 있을 정통 내무 관료들을 데리고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와 흰 고양이 한 마리를 종업원들로 고용한 다음 생선가게를 시작하는 것처럼 무모하고 황당한 짓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건이 대선을 포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외무 관료들이 힘없고 평범한 일반 국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업신여기는지는 전도연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이역만리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우리나라 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을 현지 주재 한국 영사관이 철저하고 냉정하게 깔아뭉개는 내용이다.
그래도 늦은 나이에 인생 이모작의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새로운 직업인 정치인에 도전하는 한국인 최초의 전직 유엔 사무총장에게 초장부터 쓴소리만 냅다 퍼부어서야 되겠는가? 나는 반기문 캠프를 불친절한 영사관에까지 굳기 대입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후하게 여행사라고 정의해두자. 한데 늦깎이 CEO 반기문의 여행사에는 이제껏 제대로 된 영업도, 깍듯한 고객 서비스도 해보지 않은 인사들만 북적거리는 터라 솔직히 별로 잘될 것 같지는 않다.
고건이 동사무소를 꾸리건, 반기문이 여행사를 차리건 그것이 중요한 본질이 아니다. 진짜로 커다란 문제는 지금처럼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통째로 거덜 날 것이 분명한 판국임에도 대한민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정교한 청사진과 확실한 미래비전을 가진 인물이 좀처럼 유권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선을 야당 쪽으로 잠시 돌려보자. 명색이 여론조사 지지율 1위라는, 특히나 특정한 중소 조사업체의 여론조사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강세를 과시해온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또한 미래비전이 아예 없기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도긴개긴이다.
반기문 전 총장이 영구 귀국한다는 소리에 문재인 전 대표가 첫 번째로 내보인 반응은 김해 봉하마을 묘역 참배와 관련된 신경질적 얘기였다. 살아 있는 백성들을 죽은 임금에게 강제로 무릎 꿇리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유훈정치의 틀에서 벗어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음을 문재인은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박근혜와 친박세력이 냉전적 이념논쟁을 의도적으로 부추겨 지지층을 결집시켰다면, 문재인과 친문세력은 조선왕조 시대의 송시열 같이 고리타분한 예송논쟁을 끊임없이 촉발시키며 골수 지지자들의 충성도를 가일층 공고히 다지는 작업에만 맹목적으로 초지일관 몰두해왔다.
그의 핵심 지지층은 문재인 전 대표가 그를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이끌어준 전직 대통령의 묘소만 1년 열두 달 내내 참배하고 다니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문재인 지지층이 원하는 세상은 대한민국이 참여정부 시대에 영원히 멈춰 있는 세상인 까닭에서다. 문재인의 대선캠프가 국가 대개혁에 필요한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라, 장례절차 대행이 주된 업무인 상조회사 분위기를 가면 갈수록 더욱더 짙게 풍기는 근본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설상가상으로 안희정 충남지사가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불붙은 참여정부 적통 계승 경쟁은 문재인 캠프는 물론이고 더불어민주당 역시 거대한 상조회사처럼 용도변경하고 말 것으로 보인다.
국민일보 태원준 논설위원은 ‘나는 이런 후보를 찍겠다’는 제목의 기명 칼럼에서 자신은 제4차 산업혁명을 한마디로 요약해 개념규정할 수 있는 후보자에게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비유하자면 고건의 동사무소 개설을 필두로 문재인의 상조회사 설립을 거쳐, 반기문의 여행사 창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퇴영적인 역주행 흐름에서 전대미문의 역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4차 산업혁명을 우리나라가 성공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단서와 영감을 발견하기란 그야말로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일 뿐이다.
구시대의 적폐만 청산한다고 해서 미래가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 구시대가 남기고 간 공백을 말끔히 채워줄 새로운 비전과 내용물이 충실하게 준비돼 있어야 한다. 새로운 비전과 내용물을 때맞춰 마련하지 못하면 구시대의 적폐는 원래의 제자리로 슬금슬금 다시 돌아올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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