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 가슴 아픈 역사 보도연맹 편 화제 급부상
서문영
issue@siminilbo.co.kr | 2018-03-26 10:00:00
24일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그것이 알고 싶다'가 올랐다. 이와 관련해 보도연맹의 실체를 공개한 '그것이 알고싶다'가 주목받고 있다.지난 2017년 8월 1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도둑골의 붉은 유령-여양리 뼈무덤의 비밀' 편이 전파를 탔다.
여양리 뼈무덤이란 지난 2002년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강타한 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일대에서 뼈 무덤이 발견되며 알려졌다. 알고 보니 뼈 무덤 이면에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있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좌익 전향자들을 계몽하고 지도한단 취지에서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살생부로 탈바꿈됐다.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협조할 수 있단 가능성만으로 국가가 국민을 죽인 것이다.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는 30만 명이었으나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비료나 쌀을 얻기 위해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관제에서 만든 '빨갱이'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정권을 잡기 위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잡아야만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김상중은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차라리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이야기"라고 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 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창렬이 버젓이 묻혀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 헌병대에 소속돼 항일조직을 적발하고 1950년 간첩 대장으로 임명돼 보도연맹원 학살을 지휘한 그는 수많은 공안 사건을 조작 사건을 조작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창룡 유족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서 일하신 분이고 이승만 대통령 도와서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않도록 제일 공헌 많이 하신 분"이라고 했다.
비슷한 시대를 산 다른 유족을 만났다. 민간인 희생자 유족 효전스님은 "남자들 바지에 돌을 넣게 했다. 밤중에 뱃전에 세워서 (줄을 묶은 남자들)중간을 차면 다 딸려가 물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1600명이 산채로 수장됐다. 효전스님 할아버지는 밀양의열단이었다. 독립운동 한 사람 중에서도 A급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는 주장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웠던 할아버지는 광복 후 갑자기 수감됐고 바닷속에 수장된 것.
한 기자는 "안용봉이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해방되고 나서 당연히 지역사회 시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해방되고 나서 이승만 정권 쪽에 줄을 안 섰다. 그래서 찍혀서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돼 결국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민족을 배반한 친일세력에겐 이 소식이 청천벽력이었을 터. 또한 미국은 남한을 하나의 친미세력권으로 지키는게 큰 관심사여서 국립경찰을 조직했다. 일제강점기 때 수사 경험이 많은 친일경찰들을 수뇌부로 고용해서 조직하고, 행정조직도 친일 관리를 등용했다.
친일 세력에서 친미 세력이 된 이들은 친정부 세력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를 알면서도 눈감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친일파에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 사람들은 '빨갱이'로 명분을 잡았다"고 했다.
보도연맹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전향을 독려하며 낙인을 찍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 방식은 과거의 조직과 닮아있다는데 일제시대 사상보국연맹의 방식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선 식민 지대에 반하는 조선인이 불편했고, 이들을 아카 즉 빨갱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천황페하 체제에 포섭되지 않은 것이 빨갱이였다. 그들이 남아 저항을 했다.
보도연맹을 만든 건 장경근 국방부 차관, 백한성 보도연맹 부총재, 오제도 검사 등 친일 인사였다.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 이태희는 일제강점기 말기 검사로서 재직했다.
실제 보도연맹으로 희생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족은 "빨갱이 자손이라고, 빨갱이 집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가고 나니 그 소리가 듣기 싫더라"고 했다. 비단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비극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이 희생당한 것은 물론 불이익을 받았다. 한 희생자 유족은 "집안 동생 하나는 둘이 공무원 했는데 아버지가 빨갱이었다고 직책이 안 올라갔다"고 했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간 뒤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유족들이었지만, 국가폭력으로 숨진 유족들에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를 취재한 기자는 "당시 군인이 이 사람들을 학살한 건 불법행위지만 유족들이 진상규명하는 건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란 이상한 판결 문구가 나왔다"고 했다.
유족들은 국가가 하지 않아 직접 뼈를 발굴했고 공동 묘를 만들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군인들이 묘를 파헤쳐 유골을 산산조각 내 뿌렸다.
민간인 학살 당한 사람들, 보도연맹으로 학살 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침묵해야 했다.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고단한 그 세월이 67년이었다. 실제 '그알' 취재진이 이들을 찾아갔지만 유족들은 말을 아끼거나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제작진에 마실 것을 챙겨주는 모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이의 유족도 만났다. 수십년을 행방불명 된 상태로 숨죽여 살았고 고통을 지우려 평생 술을 먹다 사망한 시아버지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며느리였다.
아직도 학살자들은 떳떳하게 살아있고, 피해자들만이 고통 속에서 숨죽여 살아가거나 억울함 속에 사망했지만 이에 대한 진실 규명조차 이뤄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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