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고하승
gohs@siminilbo.co.kr | 2021-12-09 12:03:43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 시기에 도시 개발로 인해 살 곳을 잃게 된 도시 빈민층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문득 떠오르는 오늘이다.
오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편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곧 ‘권력 구조개편’을 위한 별도 위원회를 후보 직속 기구로 출범시킨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오늘 “국민 주권 의지가 제대로 정치에 반영될 수 있게 ‘위성 정당’을 불가하게 만드는 조치가 필요하다”라고 했다.
윤석열 후보의 ‘제왕적 대통령제 개편’과 이재명 후보의 ‘위성 정당 불가조치’는 사실 무소속 손학규 후보의 한결같은 요구였다.
그가 이번에 마치 달걀로 바위 깨듯 무모하게 무소속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 역시 ‘제왕적 대통령제 개편’과 ‘100% 연동형 비례제’를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연상케 했다. 거대 패권 양당이 승자독식 체제에서 누리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리 만무한 탓이다.
그런데 그의 작은 목소리가 거대한 울림으로 나타날 조짐이다.
윤석열 후보는 대통령 권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각종 폐단의 원인이라는 문제 인식을 지니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개혁하는 별도의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거다.
윤 후보 측 핵심 관계자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권력개편을 위한 위원회 신설 및 운영계획을 담은 최종안을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에게 보고했다”라고 밝혔다.
위원회 명칭은 ‘국민이 주인 된 권력개혁위원회’(가칭)다. 후보 직속 기구로 윤석열 후보가 위원장, 김병준 위원장이 부위원장을 맡는 안이다.
이 위원회에서 다룰 핵심 과제는 대통령 권한 분산이다. 선대위 관계자는 “1탄은 프레지던트 개혁, 다시 말해 대통령 권력 내려놓기 프로젝트”라며 “작은 청와대를 컨셉으로 윤 후보가 스스로 대통령의 권한을 내려놓는 것들을 발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손 후보는 출마선언문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와 거대 양당제는 오직 갈등과 분열 대립과 투쟁을 조장할 뿐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는 없다“라면서 "무한권력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지할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밝혔다.
물론 방법상에는 차이는 있다.
손 대표는 ‘개헌’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윤 후보는 현행 헌법·법률 체제를 유지하면서 대통령제 및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방법상의 차이는 얼마든지 좁혀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손학규 후보의 무모한 도전이 윤석열 후보에게 영향을 미친 셈이다.
손 후보의 출사표는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실제 이재명 후보는 이날 오전 서울 마포구 가온스테이지에서 열린 정당혁신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국민 주권 의지가 제대로 정치에 반영될 수 있게 위성정당을 불가하게 만드는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라며 "위성정당이라는 기상천외한 편법으로 여야가 합의한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실제 한 번 작동도 못 해보고 후퇴해버린 듯하다"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 총선 당시 제1야당과 집권당은 여야 합의로 이루어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비례용 위성 정당을 만든 바 있다.
당시 바른미래당 대표로 목숨을 건 단식 끝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합의를 끌어낸 손학규 후보는 양당의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질타하며 위성 정당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내에서 유승민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안철수 일파가 그 쿠데타에 합류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고, 결국 양당은 위성 정당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뒤늦게나마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그 문제를 인식하고 바로 잡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번 대선은 손학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즉 윤석열 후보가 공감한 ‘제왕적 대통령제 개편’과 이재명 후보가 인정한 ‘위성 정당 불가조치’를 통한 100% 연동형 비례제가 활발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그게 87년 낡은 체제를 혁파하고 새로운 제7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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