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에 안기부 ‘망령’ 어른거린다
고하승
gohs@siminilbo.co.kr | 2021-12-23 12:09:58
'남산'이란 은어로 불리며 군사독재의 공포를 대변했던 곳, 남산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터가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이른바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불릴 만큼 시민들에게는 ‘공포’의 장소였던 그곳이 이제는 문화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장소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안기부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탈을 쓰고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공수처는 군사정권 당시의 안기부와 너무나 흡사한 짓을 자행하고 있다. 군사정권 당시 안기부가 ‘권력의 주구’였다면 현 정부에선 공수처가 ‘권력의 주구’가 되어 언론과 야당 정치인을 감시하는 ‘충견’ 노릇을 하고 있다.
공수처가 통신 조회를 한답시고 무차별적으로 기자는 물론 그 가족들 통신까지 조회하고, 심지어 야당 의원들의 통신자료까지 조사하는 무도한 짓을 자행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제 공수처로부터 통신자료가 조회된 언론인 수가 나날이 늘고 있다. 출입 부서도 법조 출입처에서 경제 부처 등으로 점차 확대됐다. 게다가 야당인 윤석열 캠프 의원 7명도 통신조회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여권에 비판적인 시민단체 인사나 공수처에 대한 비판 보도를 한 기자의 어머니와 동생 등 수사와 무관한 일반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통신 조회한 사실이 확인됐다. 23일 현재 공수처는 기자와 국회의원, 수사와 무관한 일반인 등을 포함해 확인된 것만 121명에 대해 통신자료 224건을 조회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직 통신사로부터 공개를 요청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기자들이 있는 걸 고려하면, 조회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통신자료란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3항에 따라 사법부나 수사기관, 정보기관이 형의 집행 또는 국가 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할 목적으로 통신사나 포털 등에 요구할 수 있는 이용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아이디, 가입일, 해지일 등 휴대전화 신상정보를 뜻한다. 법원의 허가 없이 통신자료를 조회할 수 있어 사찰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 그런데도 통신사 등은 통신자료 제공 사실을 이용자에게 알려줘야 할 의무도 없어, 이용자가 직접 공개를 요청하지 않으면 조회당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조회를 당한 사람들은 또 얼마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국민의힘 윤석열 캠프에 합류한 야당 소속 의원 가운데 추경호 원내수석부대표를 비롯해, 박성민·박수영·서일준·윤한홍·이양수·조수진 의원 등 7명도 통신자료를 조회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김진욱 공수처장과 여권 인사들을 여러 차례 고발한 시민단체 대표에 대해서도 통신자료 조회가 이뤄졌다. 공수처 수사과는 지난 8월 2일과 6일 두 차례에 걸쳐 법치주의바로세우기행동연대 이종배 대표에 대한 통신 조회를 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에 반대한 한국형사소송법학회 소속 이사 3명에 대해서도 통신 조회가 이뤄졌다.
공수처에 안기부의 망령이 어른거린다는 건 이런 이유다.
야당으로부터 “악명 높은 안기부가 다시 돌아온 것 같다”라며 “문 정권은 내로남불만 하는 줄 알았더니, 군사정권 뺨치는 정치공작까지 할 줄은 몰랐다”라는 논평이 나오기도 했다.
군사정권이 안기부를 통해 무더기 사찰하고 ‘공포’정치로 민의를 억압했듯, 문재인 정권은 공수처를 통해 광범위한 사찰을 자행하고, 그걸로 언론과 야당 인사를 억누르고, 문재인 정권을 비판하는 시민단체까지 억압하고 있는 거 아닌가.
우려했던 대로 공수처는 문재인 정권의 충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수처를 처음 만든 취지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공수처의 설립 목적은 공직사회 비리를 근절해 국가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되레 인권을 무시하는 이런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 공수처를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제는 ‘공포 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한 공수처를 해체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아울러 공수처의 통신자료 조회는 언론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즉각 중단해야 한다. 특히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혐의로 시민단체와 야당으로부터 고발당한 김진욱 공수처장은 즉각 사퇴함이 마땅하다. 이런 사태에도 그 자리를 지키려고 “수사 대상인 주요 피의자의 통화내용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뒤 통화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통신자료를 조회했고, 알고 보니 기자들도 포함돼 있었을 뿐이다”라는 취지로 해명하며 빠져나기 위해 아등거리는 모습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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