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주권자의 한 표
시민일보
siminilbo@siminilbo.co.kr | 2026-06-04 14:21:18
김기현 부천YMCA 사무총장
사라진 비례대표 한 표
민주주의 꽃인 선거, 시민들은 더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겠다는 기대를 품고 투표소를 찾는다. 그러나 이번 제9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 몇몇 지역 시민들은 투표소에서 뜻밖의 경험을 해야 했다. 손에 쥐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7장의 투표용지가 6장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은 기초의회 비례대표를 뽑는 정당투표 한 장이었다.
부천시를 비롯해 구리시, 광명시, 용인시, 경기도 4개 지역에서 기초의회 비례대표 선거가 무투표 당선으로 처리되면서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한 표를 행사할 기회조차 잃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은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그 권리가 아무 설명도, 아무 선택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역구 무투표와 비례대표 무투표는 다르다
물론 이번 지방선거에서 시장, 도의원, 기초의원 선거에서 적지 않은 무투표 당선이 발생했다. 그러나 지역구 선거의 무투표와 비례대표 선거의 무투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역구 선거는 특정 정당의 우세나 후보 부족 등 지역별 상황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비례대표 선거는 다르다. 비례대표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정당에 대한 시민의 지지와 의사를 의석에 반영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다.
따라서 비례대표 선거의 무투표는 단순히 경쟁이 없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 정당을 선택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훨씬 심각하다.
비례대표제는 정치개혁의 산물이다
기초의회 비례대표제는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도입됐다. 거대 양당 중심의 선거구조 속에서 소수정당의 지지율을 의석에 반영하고, 여성·청년·노동자·시민사회 활동가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목소리를 지방의회에 담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다양성, 전문성, 소수자 대표성, 이 세 가지 가치가 비례대표제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시민은 투표하지 못했고, 정당은 후보를 정했으며,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주권자가 빠진 비례대표 선거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이제는 ‘개방형 명부제’로 바꾸어야 한다
해외 여러 나라들은 이미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있다.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 체코 등은 개방형 명부제(Open List System)를 통해 유권자가 정당뿐 아니라 후보까지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시민들은 정당이 제시한 후보들 가운데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에게 투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당선 순위도 달라진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정당이 비례대표 순번을 결정한다. 시민은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후보 선정이 잘못되어 선거법 위반으로 등록이 무효가 되더라도 (주권을 빼앗긴) 시민들은 망연자실 바라만 볼 뿐이다.
의회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확대하겠다며 만든 제도에서 정작 시민은 배제되어 있다. 이제 정당이 아닌 시민이 비례대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정당정치를 만들고, 시민주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길이다.
잃어버린 한 표가 정치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이번 지방선거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한 투표용지 한 장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시민의 권리,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그리고 지역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함께 담겨 있었다.
잃어버린 한 표는 숫자로는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한 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정신 역시 바로 그 한 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제 정치권은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비례대표 확대와 개방형 명부제 도입을 포함한 근본적인 제도 개혁에 나서야 한다. 시민사회의 오랜 요구인 비례성 강화 역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주권자의 한 표가 사라지는 선거가 아니라, 주권자의 의사가 온전히 반영되는 선거, 이번에 잃어버린 한 표가 정치개혁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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