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논란을 보며
시민일보
siminilbo@siminilbo.co.kr | 2024-07-29 16:25:07
유재일 '유재일TV' 대표
사도광산이 발견된 건 1601년이다.
임진왜란 종전이 1598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1600년이니. 토쿠가와 막부가 시작되는 초입에 발견된 금광이다.
금광 개발 초반 연간 400kg 의 금을 생산하며 대외 결제 수단으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와미의 은, 사도의 금이 일본의 대외 무역을 촉진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601년 개발을 시작한 이때 주요한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거점을 마련하고 상관을 개설했다는 것이다. 1609년 히라도 섬이 그 시작이었고 이 히라도 섬의 무역을 일본 정부가 통제할 필요를 느껴 무역 거점을 이동하도록 조치하니 그게 데지마다. 1641년 네덜란드 동인도(이하 VOC)의 데지마 상관이 열리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대외무역을 시작하게 된다.
VOC가 일본에 팔러 온 물건은 인도산 면직물이 중심이었다. 당연히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후추, 설탕, 육두구, 계피등도 당연히 인기가 많았다. 면직물과 향신료는 인간의 피부와 혀가 거부할 수 없는 인류 보편의 마성의 상품들이었다.
포르투칼 상인들이 일본에 주로 소개했던 건 총기와 무기류였다. 그들의 상선단의 규모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선단의 규모는 차이가 났다. 화물 선적량, 상품의 종류, 그리고 이미 동남아에서 주도권을 확실히 잡은 네덜란드는 일본에 먼저 도착한 포르투갈 인들과 달랐다.
일본인들이 특이한 점은 서적과 지도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는 것이다. 과학, 의학, 천문학을 습득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망원경, 현미경, 시계로 대표되는 서양 기술 문명의 상징에도 관심이 높았다. 전국시대 직후의 일본은 전국시대 포르투갈과 교역하던 시대와 관심사도 달랐고 그에 따라 구매하는 상품도 달랐다. 탈탈 털어 무기 구매를 하는 전시동원체계가 아닌 말 그대로 상품과 문화의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를 수용하며 탄생한 난학은 번역문학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이 번역문학은 동아시아 근대 언어의 초석을 만들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일본인들의 번역으로 탄생한 말이다. 과학, 철학, 지리학 등등 학문의 이름, 주요 개념어는 모조리 이 일본의 번역을 통해 동북아에 자리잡았다.
퀴닌을 필두로 한 신약 또한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일본은 서양의학을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일본의 초기 주요 수출품은 금과 은이었다. 사도광산과 이와미은광이 주요 생산지였다. 이후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본에서 구매한 주요 상품은 도자기 였다. 조선 도공출신 이삼평(추정명, 일본명 카나가에 산베에)이 시조인 아리타 도자기가 유럽에서 대히트를 하게 된다. 아리타 도자기가 인기를 끌자, 네덜란드 상인들은 아리타 도자기의 도료인 코발트를 명나라 등지에서 구매해 일본에 공급하여 대량생산의 길을 연다. 아리타 도자기가 연 일본 공예품에 대한 호평의 경로를 따라 일본산 칠기 제품들도 유럽 수출의 길을 연다.
이삼평이 규슈 아리타에서 백토를 발견한 게 1616년. 17세기 초반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류는 점점 인류사적 대사건이 되어 간다. 유럽에서는 아리타 도자기를 이마리로 불렀다. 아리타와 이마리는 동일 제품에 대한 표현이다.
조선의 청화백자가 이 교역로를 타고 수출되지 못한 건 우리가 곱씹고 생각할 부분이라 하겠다.
17세기의 교역의 시작을 알린 사도광산의 유네스토 등재를 둘러싸고 우리는 20세기의 강제노역을 근거로 반대하고 있다. 아..... 또 친일파소리 듣겠지만 한숨이 나온다. 정신을 못차린게지. 역사인식이 뭐...... 이놈의 NL들.
이런 교류가 문명사적으로 꽃을 핀 건 18세기 중후반이 되고 나서다. 난학이 탄생하고 1774년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가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 '타펠 아나토미아'를 일본어로 번역한 해체신서는 서양과학의 언어가 동양의 언어로 번역된 기념비적인 책이다. 자연과학, 의학, 천문학이 동양인의 사고체계와 언어로 들어온 대사건이란 뜻이다. 우리는 일본의 난학 학자와 번역자들로 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빚진 사람들이다.
소설, 시, 희곡이 소개되고 번역문학이 탄생하고 세익스피어, 괴테, 발자크가 소개되자 메이지 시대의 지식 청년들은 낭만을 배운 모던보이들이 되어 갔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이런 분위기에서 확산되어 갔다.
나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찬성한다. 경제, 지식, 문화의 교류사에서 사도광산은 빠질 수 없는 스팟이다. 결제수단을 공급해준 금광을 빼놓고 무슨 상품과 지식의 교류를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NL 식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배웠으며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직시하자.
여전히 교역로와 동맹의 의미를 모르는 수준으로 어떻게 대전략의 시대를 살아 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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