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위안부 세 여인 귀향이야기
극단 한강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
시민일보
| 2002-08-19 17:19:02
최근 들어 대학로 공연에 나타난 현상은 다양한 볼거리와 오락적 재미를 추구하는 무대를 들 수 있다. 극장가에 빼앗긴 젊은이들을 끌어오기 위해서 선택한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그간 대학로가 보여준 실험성과 진지함이 사라진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모처럼 볼 수 없었던 진지한 창작극 한 편이 선보인다. 극단 한강의 ‘반쪽날개로 날아온 새’(극단한강 공동창작, 유창수 연출)
이국땅에서 해방을 맞이한 종군위안부 세 여인의 귀향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섬세한 심리묘사로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거짓에 속아 위안부가 된 봉기, 금주, 순이는 해방을 맞아 고향에 갈 준비를 한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기대감보다는 고향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순이는 자신의 몸에 있는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 깨끗한 옷을 계속 빨래하고, 금주는 가본 적도 없는 군수공장에서 일했다며 끊임없이 되뇌인다. 봉기는 위안부의 생활이 끝났음에도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날까지 몸을 판다.
날이 밝아오자 이들은 조선으로 가는 트럭을 기다리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순이는 전에 입었던 옷을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하나둘 버리고, 금주는 과장된 화장과 옷으로 불안함을 숨긴다. 이윽고 트럭이 오자 순이는 도망가 버리고 봉기는 자신이 번 돈을 금주에게 주고 떠나지 않는다. 금주만이 서서히 조선행으로 가는 발걸음을 내딛고 봉기는 나무 아래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지워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출발은 기대할 수 없다. 그녀들의 유일한 대안은 모든 것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죽음이거나 힘들게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이 작품은 단 한번의 웃음도 주지 않고 그렇다고 관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게 하지도 않는다. 57년이란 긴 세월이 흘렸음에도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아픈 역사의 한 면을 일깨워주고 숙연하게 만든다.
유창수 연출가는 “요즘 세대는 잊어버리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점차 가볍고 감각적인 것에만 집착하다보니 미래만 생각하고 과거는 잊고 살아갈 뿐이다”라며 “과거는 영원히 잊혀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며 공연 의도를 설명했다.
주로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보여줬던 극단한강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공동주최했다. 화~토요일 4:30,7:30, 일요일 4:30 (월요일 공연 없음) 소극장 오늘한강마녀 31일까지 공연.
/문향숙기자 cult@simin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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