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6-09 20:08:19
16) 銃대 멘 젊은 ‘괸당'들
이양국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로 작정한 듯 쉴새없이 많은 얘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많았고, 그래서 이만성은 머리가 절로 수그러지곤 했다.
머리에 털이 나고 귀가 빠진 이래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생소한 모습이었다. 조국이 광복되고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아들을 대한 아버지의 마음가짐도 1백80도로 급선회를 했단 말인가?
시치미 뚝 떼고 요리조리 슬금슬금 살펴보았지만, 아버지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랜세월 가슴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얘깃주머니를 풀어놓고 있으니, 해가 서쪽에서 뜨고 있는 것도 아닌데…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빈틈없고 자상한 편이지만, 입이 무겁고 과묵한 탓인지 가족들에겐 엄격한 성품의 가장으로 인식되어왔다. 자식을은 아버지 앞에서 오금을 펼 수 없었고, 떠들거나 장난을 친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에서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 분위기란 꿈속에서도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찬공기만으로 가득 채워진 가정이었다.
그런데, 고정관과 조용석이 다녀간 직후의 변화이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불씨를 그들이 뿌려놓은 결과가 아니었나 하는 야릇한 억측을 낳게 했다고나 할까?
뜬금 없이 말수가 많아진 아버지로 갑자기 변신했다는 것이야말로, ‘돌연변이’에 비길만한 일이 아니랄 수도 없다. 아버지의 얘깃주머니 속엔 아직도 무궁무진 많은 밑천이 남은 듯 연해연방 말을 이어나가오 있지 않는가.
“사실은…내가 문중회 일로 제주성내에 갔다는 얘기를 고정관과 조용석이 전해 듣고 무척 섭섭해 했다고 그랬지?”
이양국은 갑자기 얘기의 각도를 바꾸어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네, 아버님 말씀대로 얘기해 줬으니까요”
이만성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가 제주성내에 다녀온 건 사실이야. 하지만, 문중회 일 관계로 간 건 아니었어, 이건 비밀에 붙여다오. ”제주도 건국 준비위원회‘에서 비밀리에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부랴부랴 달려갓엇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단숨에…“
이양국은 말끝을 흘리고, 슬그머니 곁눈질로 아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엇다.
“네, 그러셨군요. 그럼 가신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궁금한데요. 얘기해 주세요!”
이만성은 눈을 크게 뜨며 군침을 꿀꺽 삼킨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채근을 했다.
“한자리 맡아달라고 그러더구만, 내키지 않아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뛰쳐나오고 말았단다.
수락할 수가 없었어. 벌써부터 파벌싸움에다 감투싸움에만 열을 올리고 있지뭐냐? 불길한 조짐이라구.
제주땅의 앞날이 걱정된다니까”
이양국은 입술을 떨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럴수록 아버님께서 과감하게 끼어들어서, 잘못을 바로잡고 싸움질을 못하도록 따끔하게 제동을 걸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쪽에서 얼마나 다급했으먀 아버님의 성원을 요청했겠습니까? 누구신데요? 아버님을 추대하시려고 한 분이…?”
“음, 김대호(金大豪=45)라고, 3명의 부위원장 중에서 수석부위원장이지. 비록 그 사람이 부위원장이긴 해도, ‘건준’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실권자라는 걸 알 수 있더구나! 한사코 도와달라고 애원하면서, 바지가랑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뿌리치는라 진땀을 흘렸지 무야! 인간적으로는 꼭 도와줘야 할 사람이지만…”
“김대호 부위원자님? 그 분은 어떤 분인데요?”
“그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주 제 1의 항일독립투사라구.
대단한 사람이야. 이 아비와는 모슬포에서 3년동안 한학공부를 함께 했고, 보통학교도 동창인데다 일본에서 상업학교도 같이 다녔으니 인연이 깊은 사이지. 막역한 친구인데, 과격한 성격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란 말야.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랫니지만 그건 상관없고,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 쑨다해도 믿는 편인데, 투쟁에 관한 한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질 않는다구, 독불장군이라서…조직의 틀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지만…”
“아버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군요. 어쩌면 또…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만성은 무척 아쉽게 생각되었지만, 이러쿵 저러쿵 의견을 말할 입장도 아닌지라 말끝을 얼버무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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