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7-03 19:23:46

(3) 7년 가꾼 순정의 꽃

“내가 열한살때부터 알게 되었어. 우리 집안이 친일파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온 사실을…. 나는 두렵기도 했지만, 아버지를 원망했다. ‘집안에서 호랑이처럼 무서운 아버지가 친일파를 왜 때려잡지 않으세요?’ 하구.

그러자 아버지는 이유가 있다고 그러시더군.

어느날 아버지가 최상균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엄중항의를 했었는데, 적반하장격으로 큰 소리치면서 공갈협박을 했다는 게야.

1932년에 있었던 ‘제주해녀항일투쟁’을 들먹이면서, 주동자 김대호(건준제주부위원장)와 친구로서 한통속이 아니냐고 생때를 썼었다지 뭔가”

이만성은 치를 떨었고, 김순익은 눈을 크게 뜨며 소스라치게놀라는 것이었다.

“아니. 김대호선생과 자네 아버님이 친구사이였단 말인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래서 왜 그게 약점이 되었었다는 얘긴가? 한통속이란 말까지 나왔던 모양이구…?”

“김대호선생은 8년동안 감옥생활을 하셨지. 까불면 경찰에 말해서 뜨거운 맛 보여줄 수 있는데, 그래도 좋겠냐고 을러댔던거라구. 울며겨자 먹기로 아버지는 땅을 포기하시고 말았어”

이만성은 분노를 삭일 수 없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모함, 그건 참 무서운거야. 귀신도 모르게 생사람 잡는 흉기라서말야. 그렇다면 해방된지 어제 오늘도 아닌데, 왜 그냥 방치하고 있는게야?”

“한맺힌 응어리야 어딜 가겠는가? 그렇다고 시대가 바뀌었다 해서, 당장 보복하겠다는 것은 비열한 행동이 아니겠어? 내용을 모르는 제 3자로부터 오해를 살 소지도 없지 않구, 기회를 엿보다 녀석들이 제 버릇 개 못 주고 또다시 횡포를 부렸을 때 천둥번개 내리치는 것도 멋있는 일 아니겠나 싶거든!”

이만성은 후일로 미루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것은 당장 김순익과 함께 행동할 수 없음을 암시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만성은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으면서도 속 맘은 그게 아니었다.

김순익을 불신하거나 업신여겨서라기 보다도, 끌려다니는 것 같은 선입견이 앞섬으로써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고정관과 조용석이라면 무턱대고 손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크나큰 기대를 안고 찾아왔던 김순익은 알았노라며 실망한 얼굴로 돌아간 사실이, 이만성의 가슴 한 구석에 ‘뜨거운 감자’로 줄곧 껄끄럽게 작용해 온 것이었다.

그래서 이만성은 고정관과 조용석을 만난 순간, 불현듯 그 일이 떠올랐었지만, 술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 흐지부지 행방을 감춰버린터였다.

공교롭게도 그들과 헤어진 직후, 꼬리를 감췄던 그것이 조롱이라도 하듯 선명하게 몸통을 드러냈으니…. 이만성은 환호성을 올리려다 주춤하고, 뒤쫓아가기로 결심했다.

달미동에서 한남마을로 가는 길은 두가닥으로 틔어 있었다. 하나는 비좁고 가파른 지름길이었고, 또 하나는 자동차도 느릿느릿 굴러다닐 수 있는 가파르지만 널찍한 길이었다.

이만성은 지름길로 들어섰다. 운이 좋으면 중간지점에서 따라잡을 수도 있겠지 싶어서였다.

그렇긴하나 어쩌면 두사람은 도선마을에 들렀다 귀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에서 그들이 도선마을 어쩌고 했던 소리를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한남마을까지 내려가시는거다! 만약, 도선마을에 갔다면 늦게 귀가하겠지? 밤을 세워서라도 고정관의 집에서 기다리다가 기필코 만나보고 돌아오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이만성의 고정관의 집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하늘이 우중충한 탓인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음산한 밤이었다.

길거리에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이만성이 숨을 죽인 채 대문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뒤숭 뒤숭…울타리 안에서 필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듯 소름끼치는 그 무엇이 머리털을 쭈볏거리게 했다. 코를 벌름거려보았지만 피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길감을 떨어버릴 수 없으니 그게 무엇일까? 이만성은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개미소리처럼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3명의 괴한들이 대문 밖으로 후닥닥 뛰쳐나왔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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