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7-05 15:58:43
(4) 7년 가꾼 순정의 꽃
3명의 괴한들-어두운 밤인데도 한결같이 검정옷 차림에다 얼굴엔 복면을 하고 있다. 좀도둑 같지는 않다. 정치적 성격을 띤 저격범들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토록 완전무장을…? 보나마나 살인용 무기를 품속 깊숙이 감췄을 것은 불문가지 뻔한 일일터였다.
집안에 불이 켜 있지 않으므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첫눈에 알아올 수 있었다. 동시에 고정관과 조용석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었다. 담장에 바싹 붙어선 채, 이만성은 대문 밖으로 뛰쳐나온 괴한들의 뒷모습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저 괴한들―녀석들은 대문 밖에서 주위를 휘 둘러본 다음, 바람과 같이 휙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이만성은 재빨리 담벼락에서 떨어져 나왔다.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고양이 눈깔처럼 눈알을 부풀린 다음, 동서남북을 꿰뚫어 살펴보았다.
한참 후에야 가물거리는 그림자들이 레이더망에 잡혔다. 50여m 떨어진 지점, 그것을 동쪽으로 트인 길목이었다.
설마하니 홍길동처럼 신출귀몰, 희한한 재주부리는 그런 녀석들이야 아니겠지?.
현대판 홍길동만 아닐 것 같으면 저 녀석들을 때려잡는 건 식은 죽 먹기이자 시간문제가 아닐 것인가? 뒤를 밟자! 팔자에도 없는 명탐정이 되어 살얼음판 기는 추적을 벌인 끝에 덜미를 잡는 거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랫도리가 휘청대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한남마을의 청년들은 아닐테고 원정 나온,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객기만을 내세워 테러리스트들을 추적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없는 모험이 아니랄 수 없다.
그러나 이만성은 두렵긴 커녕 스릴을 느낄 수 있어서 군침이 돌았다.
그는 50여m의 거리를 확보했다. 괴한들은 곧 ‘한남천’ 다리를 건넜다. 원정나온 저격범들이란 사실이 명백해졌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평화의 땅 제주도에서 살인마가 밤을 주름잡다니….
사태의 심각성을 되새기자 사지가 마구 떨려 견딜 수가 없다.
당장 저놈들을 벼락치듯 때려잡고 싶지만, 저것들은 보잘 것 없는 졸때기 하수인에 지나지 않을터….성급하게 무모한 공격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배후에서 원격조종(遠隔操縱)하고 있는 ‘얼굴없는 우두머리’를 낚아 올려야 할 테니까.
밤을 이용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하수인들을 고정관의 집에 침입시킨 의도는 무엇일까? 고정관의 집이 갑부의 집이거나 세도가의 집이라면 모를 일이다.
홀어머니 혼자 ‘물질’을 해서 근근이 벌어먹고 사는 가난한 집구석이다. 그렇다면 괴한들은 돈이나 보물을 훔치기 위해 침입한 날 강도들이라고 볼만한 건더기를 발견 할 수 없지 않은가?
테러가 목적? 고정관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음모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고정관-조용석, 그들은 늦게 귀가하게 된 것이 천행인셈이었다.
이만성보다 먼저 귀가했더라면 액운을 면키 어려웠을 터인데, 두사람을 대신해서 역습을 감행하게 된 이만성은 난생 처음 값진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선배들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하게 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자 꿈 같기만 했다. 이만성은 마구 힘이 솟구쳤다. 온 신경을 눈에 모았다. 괴한들은 시종일관 앞만 보고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성은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양말만 신은채 살얼음판 기어가듯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놈들의 행선지는 과연 어디란 말인가? 서귀포 못미처 동남마을? 아니면 서귀포나 제주성내…?
가끕든 멀든 상관없다. 지구의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덜미를 잡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돼있는 이만성이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놈들은 어디엔가 함정을 파놓고 유인작적을…?
갑자기 뒷모습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만성은 네 굽을 놓아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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