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8-13 17:52:20

(9) ‘낮에 뜬 별’들의 행진

조문객 아닌 지관(地官)의 신분으로 최여인의 아들은 한양의 서씨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 최 여인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대문밖에 ‘謹弔’라는 두 글자가 씌어진 커다란 등(燈)이 내걸렸고, 문전에는 조문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젊은 지관은 상주에게 신분을 밝히고, 마나님을 뵙게 해 달라고 간청를 했다. 30대의 우락부락한 상주는 한참 망설인 끝에 자신의 어머니인 미망인에게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너는 …30년전에 저의 어머니가 이 댁에서 노비로 있었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실수로 죄를 짓고 뒤주 속에 갇혀 사경을 헤매던 중, 마나님의 도움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노비의 아들이옵니다. 저는 10여년 동안 풍수지리를 공부했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생명의 은인이신 마나님께 보답하는 길은 명당자리를 찾아드리는 길 밖에 달리 방법이 없으시다기에 부랴부랴 달려온 것입니다. 그리 아시고 장지에 관한 한 모든 걸 저에게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아니구, 기특도 하지! 나는 깜박 잊고 있었는데, 자네 어머니는 크게 성공하고 훌륭한 아들까지 두고 있었다니, 꿈 같기만 하구나! 더 없이 반갑고 그지없이 기쁜 일이군 그래. 어차피 찾아와 줬으니, 자네가 알아서 우리 영감님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모실 수 있도록 손을 써 주게나, 그 은혜 잊지 않음세”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나님은 매우 감격해하시면서, 노비의 아들이 기도한 지관에게 극진히 대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윽고, 젊은 지관은 관을 싣고 두 아들을 앞세워 한양을 떠났다.

수륙천리 장거리 여행 끝에 제주땅에 들어섰다. 긴 여행에 힘이 빠진 두 아들은 말끝마다 불만이었고,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일쑤였지만, 젊은 지관은 꾹 참았기에 도중하차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곤 했다.

“억만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명당중의 명당이란 말요. 임금님을 낳게 한다는 명당-황해도에 두 군데가 있다지만 그곳은 이미 주인들이 차지해 버렸고 또 두 군데가 남았는데 그게 제주도라구요. 또 두 군데가 남았는데 그게 제주도라구요. 둘 중의 하나인 명당이 아버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말이오”

젊은 지관은 두 아들을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다. 제주도에 상륙한 다음에도 첩첩산중 고난의 길을 헤매고 또 헤맨 끝에 한라산 가파른 기슭을 거슬러 올라가자 질판하게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젊은 지관은 ‘문제의 명당이 바로 여기다!”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자 두 아들은 부리나케 문제의 지점을 파헤쳤다. 그 때였다. 뽀얀 구름조각이 연기처럼 모락모락 치어오른 것을…. 명당임을 확인한 두 아들은 그러나 고개만 끄덕거릴 뿐 가타부타 아무말도 하지를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맏아들이 입을 열었다.

“명당도 좋고 임금님도 좋지만, 우리 두 형제는 아버님의 시신을 이곳에 묻을 수 없소. 수륙천리, 거리가 멀고 길이 험난해서 성묘 한번하기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지 않겠소? 그냥 되돌아가야겠소. 한양근처에 모시고 싶소”
두 아들은 시신을 앞세우고 휭 하니 내빼버리는 것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멍하니 서있던 젊은 지관은 그렇다고 해서 체념할 수 없었고, 두 아들의 뒤를 따라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늙은 마나님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두 아들을 마당 한 복판에 꿇어앉힌 다음, 하인에게 명령해서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질 때까지 몽둥이 찜질을 퍼부었다.

“마나님, 노여움을 푸십시오, 길은 또 있습니다. 젊은 지관은 제2의 명당을 책임지기로 다짐하고, 시신을 앞세워 또다시 한양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늙은 마나님에게, “3년이 지나면 소식을 드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몇마디 뜻있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나고 말았었다.

그런데, 3년이 갓 지난 어느날, 마나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묘소의 위치를 그린 약도가 들어있는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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