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시민일보
| 2003-09-04 19:25:07
(6) 불을 뿜는 海女示威
제 닭 잡아먹기 놀음에 넋을 잃고 있는 최정옥을 요긴히 써먹을 데가 따로 있다고 생각되자, 이만성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왜 진작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이만성은 뒤늦게 나마 본의 아니게 최정옥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해준 데 대한 반대급부와도 같은, 엄청난 보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를 미끼로 덫을 놓는 거다. 최상균·최상수 형제를 때려잡는 데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도구로서의 덫. 그들 형제가 덫에 걸려들도록 꼬드겨줄 미끼로 최정옥을 이용한다면 결과는 뻔한거니까’
10년 동안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해온 이만성-그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2마리의 얼룩소. 도살장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다가가고 있는 2마리의 얼룩소, 그것은 최상균·최상수였다.
그들 형제는 이만성의 집안을 탄압하고 농토를 짓밟아 농사를 망치게 해온, 말하자면, 치가 떨리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는 양지가 되듯, 이 땅의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되었고, 마치 물이 흐르는 이치대로 자연스럽게 묵은 것들을 털어 내고 깨끗하게 새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게 되었다.
최씨 집안에 대한 보복은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두르지 않더라도 개인적 감정적 한풀이의 테두리를 벗어나 제물에 순순히 풀린다고 보아 틀림 없을터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만성은 생각 같아서는 단방 치기로 우지끈 뚝딱 요절을 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때가 있는 법, 일어설 때와 엎드릴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엎드린 자세로 자숙하고 자중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진정시키기 어려운 것은 초조감이었다. 그러던 중 어김없이 때는 이만성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서 날 잡아 잡수! 하는 식으로, 최정옥이 껑충 품안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불로소득과도 같은 엄청난 횡재였다. 초조감은 신바람으로 바뀌었다. 복수용 도구로 써먹기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녀-이만승은 좋은 일 해주고 뺨 얻어맞는 격으로, 시도 때도 없이 청혼이라는 어설픈 구실을 내걸고 접근해올 때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진절머리 쳐온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만성으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양동(陽動) 작전을 짜도록 촉매작용을 해준 셈이므로, 이제 시달림은 고마움으로 바뀐 셈이 되었다. 일반심리학과 사회심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이만성에게 여성특유의 시기심, 질투심, 적개심 등을 바닥에 깐 ‘양동작전’을 충동질해 주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일 것인가?
이만성은 「진명의숙」 중등반 학생중에서 최정옥의 맞수가 될만한 2명의 여학생을 점찍었다. 강은자와 양숙희-최정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반반하고 허여멀쑥하고 끌밋하고…
시골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미모의 여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만성은 2명의 여학생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쇼를 연출하느라 지혜롭게 ‘숨은비법’을 활용할 뿐이었다.
예상대로 그 작전은 최정옥에게 잘 먹혀들어 갔다. 강은자·양숙희를 대하는 최정옥의 얼굴은 글자그대로 시기·질투·적개심의 화신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은자·양숙희를 상대로 최정옥의 암투는 격렬하게 푸른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결굴 시간이 문제일 뿐, 3인의 격돌은 기정사실임을 이만성은 예리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격돌결과에 대한 채점들도 이만성은 대충 작성해 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최정옥은 2명 아니 5명도 거뜬히 때려눕힐 수 있는 막강한 ‘몽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강은자·양숙희가 매를 맞고 참패를 당했을 때, 패자를 둘러싼 친척 그리고 온 동네가 들고일어나 물일 듯이 최씨 집안을 덮치는 끔찍한 사태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만성은 충분히 내다 볼 수 있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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